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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 입학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쌍둥이 동생인 쥬시마츠와 같이 TV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쥬시마츠는 TV를 보는 내 곁에 누워 쉴 새 없이 야구공을 천장으로 던졌다 받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당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던 드라마에선 주인공이 드디어 첫사랑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인기 아이돌이지만 연기력마저 출중한 그는, 그동안의 설렘과 떨림을 모두 응축한 듯 젖은 눈빛으로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던 그녀에게 고백한다. 나는 그 감동스러운 장면에 눈물이 멈추지 않아, 여러 장의 티슈를 적시고 있었다.

 

  「오랫동안 좋아해 왔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너를 사랑해.」

 

  고백의 상대는 더없이 기쁜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본격적으로 그에 대해 대답을 하기 전 내린 적막을 가르는 건, 내가 코를 푸는 소리와 중력을 거스르고 던져졌던 야구공이 쥬시마츠의 손바닥을 때리는 소리뿐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마음이 어떤 것일까. 이 퍼펙트 가이의 화려한 고교데뷔가 머지않긴 했지만, 나는 아직 첫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잠시 정도 얼굴을 붉히게 만든 사람들은 있어도, 내내 감정을 품으며 그 크기를 키워가게 만든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좋아한다’도 아니고 ‘사랑한다’라니, 솔직히 말해 아직은 먼일 같이 느껴지기도 했고.

 

  “카라마츠 형아.”

  “왜 그러지, 브라더?”

  “첫사랑이 그렇게 대단한가.”

 

  마음이 통한 두 주인공은 서로를 감싸 안으며 그 순간을 만끽한다. 더없이 로맨틱한 장면을 두고 나는 쥬시마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항? 당연한 것 아니겠나 브라더. 가슴이 벅차 타오르고 바디가 전율하며 마치 썬더가 머릿속에 내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겠지. 수많은 카라마츠 걸즈가 매일같이 느낄 그 고통과 같이 말이다…. 그래서 이 형님이 길티가이인 것이지.”

  “물론 좋은 것 같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던데.”

  “응? 쥬시마츠 너는 첫사랑이라는 것을 해보았나?”

  “헤. 일단 여자 친구도 있는데.”

 

  마이 리틀 쥬시마츠, 그런 건 말을 했어야지! 흥분한 내가 침을 튀기며 그의 어깨를 흔들어도, 쥬시마츠는 멈추지 않고 야구공을 던졌다. 결국, 각도를 비켜나간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내 머리 위로 떨어져, 나는 그를 붙잡은 어깨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야….”

 

  물렁물렁한 감수성 때문이 아니라 통증으로 인한 생리적 눈물을 매단 채 쥬시마츠에게 탓하는 눈을 했지만, 물기 어린 시야에 보인 것은 평소와 다르게 입을 다문 채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는 쥬시마츠였다.

뭐야, 아닌 척해도 결국 좋은 거 맞잖아?

 

 

 

 

 

  쥬시마츠는 고교 야구에서 몇 번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명문인 고등학교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었다. 두말할 것 없이 좋은 기회였고, 쥬시마츠는 예정대로 약간의 특혜와 함께 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때는 연극에 심취했었던 나머지 성적이 다소 (그러니까 정말 아주 약간) 부족했던 내가 그를 따라 입학하기엔 명문의 허들이란 너무 높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배경에 발을 내디뎠다. 항상 같이 묶여 ‘너희들은 뇌까지 근육인 건 아니겠지?’라거나, ‘여러모로 당황스러움이 두 배라니까.’라며 오히려 듣는 나를 당황하게 했던 쌍둥이의 비애는 이제 작별인 거다. 아디오스, 그동안의 새드니스! 웰 컴, 뷰티풀 해피니스!

 

  너무 설렜던 거겠지. 나는 처음으로 혼자가 된 등굣길이 너무 떨려서 그만 과하게 일찍 나오고 마는 우를 범했다. 분명 아침에 단장하느라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은데…. 그만큼 일찍 일어났다는 거겠지.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았다. 쥬시마츠가 곁에 없어도 다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조금 돌아가자고 마음먹었다.

 

  “흐흠, 머리 오케이. 교복 오케이. 퍼펙트하다.”

 

  세 갈래로 나뉜 거리의 가운데에는 도로의 안전을 위한 볼록거울이 있었다. 나는 그 거울로 용모와 복장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었는데, 거울에 비추는 나의 뒤로 주위를 사정없이 힐끔거리는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마스크까지 꼼꼼하게 끼고,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모습에 나는 겁이 났지만, 아침이라는 시간의 힘을 빌려 그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사실 쫓고 싶지 않아도 그가 가는 길이 내가 학교에 가기 위해 돌아가는 길이어서 내심 다른 학생을 만날 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다.

 

  남자는 꽤 장신이었지만 매고 있는 크로스백의 끈을 쥔 채 몸을 움츠린 탓에 크게 티가 나질 않았다. 역시 사정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부스스한 뒷머리를 긁는다. 뒤를 밟는 게 아니었나. 긴장감에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데, 남자가 별안간 전봇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나는 재빠르게 담벼락 뒤로 숨어 그의 행동거지를 지켜봤다.

 

 

  “오랜만이네. 춥진 않았어?”

 

 

  마스크를 턱 끝까지 내린 남자가 누군가에게 살갑게 말을 건넨다. 아무도 안 보이는데, 설마 전봇대와 말이 통하는 초능력자인가.

 

 

  “너 오늘은 꼭 약 먹어야 해. 피부병이 심하다고. 간식도 줄 테니까 제발 뱉지만 마.”

 

 

  고양이구나. 주섬주섬 가방을 헤치는 남자 뒤로 부드럽게 움직이는 꼬리가 보였다. 남자는 가방에서 약봉지를 꺼내면서도 고양이의 머리 쓰다듬기를 잊지 않았다. 고양이는 작게 울고 남자의 다리 옆으로 파고들어 머리를 비볐다. 꽤 친한 사이인지 발라당 드러눕기까지 한다.

 

  나는 담벼락에서 나와 조금 더 가까운 거리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지척에 다가와도 남자는 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남자가 까준 캔을 허겁지겁 먹는 고양이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미소만 짓고 있었다. 고양이는 허기가 심했는지 작은 캔 하나를 순식간에 동나게 했다. 그를 지켜보던 남자는 간식을 꺼내 알약을 안 보이게 숨겼다. 눈에 불을 켜고 간식을 먹는 고양이가 혹여나 약을 뱉을까, 머리와 주둥이를 두 손으로 잡고 쓰다듬기까지 했다.

 

 

  “옳지, 잘했어. 착하다. 예뻐.”

 

 

  이제서 보니 나른하듯 보이지만 잘생겼다. 남자는 쓰다듬던 손으로 안경을 추켜올리고는 팔짱을 껴 무릎에 얹었다. 자신이 약을 먹었는지조차 모르는 듯 보이는 고양이가 골골대자, 그것이 또 못내 흐뭇한지 ‘히히.’ 하며 어린아이 같이 웃었다.

 

 

  “그래도 겨울 동안 잘 버텨줘서 대견해. 또 보자. 혹시라도 길 건널 때 차 조심해야 한다?”

 

 

  마지막 인사까지 상냥하게 건넨 남자는 쭈그렸던 무릎을 펴고 다시 길을 나섰다. 야옹, 고양이가 다시금 울자 가던 길 그대로 고개를 돌려 고양이를 쳐다보기도 했는데,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내 심드렁하게 마스크를 올리고는 걸음을 옮겼지만.

 

  나는 어쩐지 두근거리는 심장이 이해가 가질 않아, 가슴에 가만히 손을 대고 서 있었다.

 

 

  “뭐야….”

 

 

  남자가 다시 골목을 돌아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던 나는, 안온한 날씨 속에 혼자만 붉어진 얼굴을 수습하지 못하고 애꿎은 뒷머리만 정리했다.

  시간이 꽤 흘러 이제는 부지런히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 봤자 지각은 안 할 테지만.

  발이 커지기도 했고,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새로 산 운동화의 앞 코는 때가 묻지 않아 하얗다. 익숙하지 않은 길에, 너무나도 익숙한 바닥의 검은 아스팔트와 대비되는 하얀 앞코가 이질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주 잠깐 어렴풋이 생각했다. 쥬시마츠 말대로 첫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결코 대단하지 않을 수가 있겠다고.

 

 

 

 

 

  남자를 다시 만난 건 학교에 도착해 참여한 조례 때였다.

  고양이에게 보여준 다정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삐뚜름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서 있다가 하품을 하는 남자는 자리가 심각하게 따분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어쩐지 쥬시마츠와 같은 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것이 처음으로 뿌듯해졌다.

 

 

 

 

 

**

 

 

 

  작은 기대가 있긴 했지만 역시 새로 마주하는 선생님 중 남자를 찾을 수는 없었다. 전 과목의 시간이 한 바퀴 다 지나고도 그를 볼 기회가 없자, 나는 그가 위 학년의 선생님은 아닐까 짐작만 했다. 그나마도 학기 초의 부산스러움이 그를 떠올리지 않게 도와주긴 했다.

 

  중학교 때처럼 연극부에 다시 들어가진 않았다. 부쩍 외양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로 더 건강하고 멋진 몸을 위해 운동에 관련된 부 활동을 찾게 됐다. 그러다가 찾은 것이 농구부였고, 망설임 없이 입부신청서를 냈다. 농구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했다. 최소한 몇 명이 게임을 하는지에 대해도 몰랐으니.

훈련이 고된지 녹초가 된 쥬시마츠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에 드러눕곤 했는데, 그런 그의 곁에 다가가 농구부에 들었다고 말을 하니 감았던 눈을 뜨고 말했다.

 

  ‘부상 조심해, 형아.’

 

  그래도 농구보단 역시 야구가 낫지 않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덧붙인 말에 대해선 무어라 할 말이 없었지만, 부상을 조심하라는 소리에는 웃음으로 받아쳤다.

 

  ‘설마 너처럼 본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닌데 다칠 일이야 있겠어? 걱정은 고맙다, 브라더. 하지만 부상은 이 몸의 손에 의해 쉴 새 없이 골대를 넘어들 공이 받지 않겠나? 하하!’

 

 

  …그렇게 대답했었지, 아마.

  농구부에 들어갔다고 바로 골을 넣고, 경기에 임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나를 포함한 신입부원들은 공이랑 친해지라는 명목하에 널브러진 공을 치우거나, 닦거나, 정리하는 일을 도맡았다. 물론 그 공이 부딪힐 바닥 닦기까지. 그렇게 그날도 널브러진 공들을 치우고 있었다. 이미 품에 안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안은 공에 아슬아슬하게 얹은 공 때문에 시야가 좁았다. 공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미처 내딛는 발 앞에 있는 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뒤로 넘어지며, 안고 있던 공까지 고스란히 얼굴로 받았다. 얼얼한 아픔에 눈물이 나와 눈을 훔치고 있었는데 동기 하나가 말했다. 지금 눈물 닦을 때가 아니야!

 

  그렇게 해서 코를 휴지로 틀어막고, 나는 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처음 보건실을 찾았다. 남자다운 척을 하느라 같이 가주겠다는 선배를 한사코 만류하며. 보건실이 1층에 자리한 덕분에 먼 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돼 다행이었다. 점점 어지럼증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거의 다다랐을 때, 다시금 머리가 지끈 울려 문을 열지 못하고 그저 몸을 살짝 숙여 이마만 갖다 대었다.

 

 

  “으…….”

 

 

  설마 뇌진탕은 아니겠지. 두려운 생각에 다시 눈물이 나려 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순식간에 기댈 곳을 잃은 머리와 몸은 자연스레 하강했다. 다시 바닥에 부딪힐까, 나는 본능적인 공포에 눈을 꼭 감았고, 반사적으로 코를 움켜쥔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이크, 큰일 날 뻔했네. 어이, 괜찮아?”

 

 

  아프지 않다. 다가올 고통 때문에 찌푸려졌던 미간은 어딘가 부드럽지만 단단한 품 안에서 서서히 풀어져 눈을 뜨기를 허락했다. 하얀 가운, 백의…. 그리고 한 번쯤 들었던 낮은 목소리.

 

 

  “코피 흘리고 있잖아. 일단 들어가자. 걸을 수 있겠어? 부축 필요하니?”

 

 

  고양이한테 다정하게 지어주던 미소가 참 예뻤던,

 

 

  “그때 그 사람…….”

  “뭐? 어, 어! 이봐!”

 

 

  왜 갑자기 그렇게 안도의 마음이 들었던 걸까. 나는 다급한 목소리와 은은하게 풍기는 커피 향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기 바로 전에, 부상을 조심하라는 쥬시마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던 것 같기도 하지만, 역시 제일 또렷이 들렸던 것은 ‘교과목 선생님이 아니어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거였구나.’ 하는 깨달음의 소리였다.

 

 

 

 

 

  눈을 뜨니 보이는 건 역시나 익숙한 천정 텍스였다. 매일같이 생활하는 교실에서의 그것과 똑같은. 맞아, 나 보건실에 들어가려다가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으아…….”

 

 

  누워있던 침대에서 벌떡 상체를 드니,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일었다. 그렇게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 앓고 있었는데, 커튼 너머로 인영이 아른거리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깼어? 들어가도 될까?”

 

 

  나는 두통에 쥐어뜯던 머리를 재빠르게 정돈하고, 입고 있던 체육복을 두어 번 털고서,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깊게 한 다음 조금 낮게 ‘네.’ 라고 대답했다. 커튼이 열리고 들어오는 남자는 정신을 잃기 전 떠올린 그 사람이 맞았다.

 

 

  “흠. 일단 물어볼게. 여기가 어딘지는 알겠나? 아까 상황은 기억나고?”

  “부 활동하다가 농구공 때문에 뒤로 넘어졌고…. 농구공들이 막 얼굴에 쏟아지니까 눈앞이 밤하늘의 스타들처럼 반짝반짝…! 그렇게 코피도 나고! 보건실에 문 앞에서 또 두통이 와서, 잠깐 기댄다는 게…….”

  “스타? …뭐, 어찌 됐든 다행히 잘 기억하고 있네. 네가 기절해 있는 동안 부원들이 네 짐을 가지고 왔다 갔어. 사실 바로 구급차를 부르려다가 이런 상황에선 절대 안정이 최선일 때가 있어서 눕혀놨고. 어디 보자, 지금은 좀 어때? 어지럽고, 토할 것 같고 뭐 그런 건 없나?”

 

 

  백의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나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상체를 숙였다. 그대로 손을 뻗어 내 뒤통수를 조심히 매만졌고, ‘혹이 좀 심하네.’ 하고 중얼거린 뒤 작은 후레시로 양쪽 눈을 비춰 보았다. 빛에 놀란 시야가 다시 정상궤도에 오르고도 나는 멍청하게 남자를 바라봤다.

 

  그때는 엿본다는 상황이기도 했고, 마스크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질 못했는데, 생각했던 대로 역시 잘생겼다.

나른하게 내리뜬 눈이 잘생겼고, 높은 코가 잘생겼고, 굳게 닫힌 입이 잘생겼다.

게다가 저 하얀 가운은 분명히 이 남자를 위해 태어났다. 면직물로써 보람되게 태어났군. 좋은 라이프를 누려라….

가만, 저런 모습을 하고 그렇게 약한 고양이에게 다정한 건가. 심지어 직업도 양호선생님이라니, 이렇게나 세심하게 날 봐주다니. 완전 사기잖아!

심지어 손가락도 길고 곧다. 저렇게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만져준 것인가? 넓게 벌린 왼손엔 아직 반지가 없군. 결혼은 아직 인가. 그렇다면…….

 

 

  “어이! 괜찮아? 역시 머리 아파? 같이 병원 가줄까? 천천히 어디가 이상한지 말해봐.”

 

 

  아, 정신 차리라고 손을 흔들던 거였군. 나도 모르게 감상을 하고 말았다. 꽤 진지한 표정으로 걱정을 하는 남자가 어쩐지 정말 심각해 보여서, 나는 아까부터 느끼던 증상을 가감 없이 털어놨다.

 

 

  계속 심장이 떨리고, 숨이 가빠. 뭔가 울고 싶기도 하고 숨고 싶기도 해요. 선생님 이름도 궁금하고, 살짝 배도 고픈 것 같고…….

 

 

 

 

 

**

 

 

 

  “여기서 이 포물선이 x축으로 5만큼 이동했을 때, y축이랑 만나는 점은…….”

  “하아.”

  “누구야, 한숨 쉰 놈?”

  “네 선생님! 제가 방금 들었는데, 분명히 마츠노 입니다!”

  “너 인마, 네가 더 시끄럽다. 나와서 이 문제 풀어봐.”

 

 

  도통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수업뿐이랴, 부 활동을 하면서도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냐는 호통도 들어봤고, 집에선 쥬시마츠가 장난스럽게 공을 던져도 알아채지 못했다.

눈을 감지 않아도 아른거린다. 눈을 감으면 선명해졌다.

 

 

  「미안한데 보건실에서는 개근상 안 줘. 혹시 착각하고 있을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야.」

 

  그런 착각 안 해. 그곳이 아니면 선생님 볼 수가 없단 말이야.

 

  「너 문학 점수 볼만하다며. 토도마츠 선생이 다 말해주던데.」

 

  그거야, 시험에 나온 시가, 완전 선생님을 떠오르게 했다고. 나는 열심히 해보려 했다!

 

  「그렇게 아무에게나 상냥한 거 안 좋아. 적당히 선을 그어, 바보같이 웃어넘기지 말고.」

 

  그러는 선생님은, 왜 그렇게 선을 긋는 건데? 다른 애들은 선생님이 너무 차갑대. 이렇게 다정한데, 난 이해가 안 가.

 

  「넌 아직 어려서 몰라. 억울하면 빨리 커라.」

 

  나도 어서 어른이 됐으면 좋겠어. 나는 왜 이렇게 선생님보다 늦게 태어났지?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했다. 나는 늦게 태어나고 싶어서 늦게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만 해도 선생님이 애인이 있는지 알아내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내가 질문을 할 때마다, ‘그건 네가 알아서 뭐하게. 꼬맹이 주제에.’라고 하는데, 기껏 받아친 대답이라고는 ‘나 꼬맹이 아니다!’라고 소리치는 것밖에는 없었다. 오히려 그게 더 꼬맹이처럼 보이진 않았을까, 그날 밤 이불을 몇 번이나 찼는지 모르겠다. 결국엔 친구 부탁으로 우연찮게 들린 교무실에서, 한가롭게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토도마츠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가 알아낼 수 있었다.

 

  ‘흠-. 그런 어둠 인형이 애인이 있을 리가. 없어, 없어.’

 

  한없이 다정한 선생님더러 어둠 인형이라고 부르는 토도마츠 선생님에게 부정조차 하지 못했다. 갑자기 너무 기쁜 마음이 들어, 나는 바짝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유인물이 잔뜩 구겨졌지만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 길로 보건실까지 달려가는데, 발걸음이 어찌나 가벼웠는지 이대로라면 이번 체육대회 계주에서 반드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드디어 알아냈다! 선생님에겐 애인이 없다는 사실!’

  ‘요란하게 들어와서 하는 말이 겨우 그거냐? 누구야, 톳티 선생이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나! 애니웨이, 선생님한테 애인이 없다는 건 사실인가 보군, 하항!’

  ‘…애니웨이고 자시고, 너 왜 그렇게 기뻐 보이는데. 내가 애인이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좋은 소식인가? 아, 역시 안타는 쓰레기에겐 애인도 사치란 말이시군요. 잘 알았습니다, 마츠노님. 평생 혼자서 썩어드리죠.’

  ‘아, 아니! 그 말이 아니다!’

 

  어쩐지 실수를 했나 싶어 진땀이 나려던 차였지만 커피가 담긴 머그잔에 닿는 선생님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있어,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예쁜 미소였다.

 

  그렇게 나는 이번 수학 시간에는 선생님이 웃던 순간을 떠올리느라 공부를 하지 못했다. 괜찮아, 수학이란 자고로 돈 계산만 할 줄 알면 된다.

 

 

 

 

 

  농구는 재미있었다. 드리블하는 건 여전히 어려웠지만, 수십 번 던진 슛 중에 하나라도 골인이 되면 뿌듯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마저도 정말 수십 번 중의 하나였지만.

 

  의도치 않았지만 나는 다치는 일이 많았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뒤로 넘어가는 일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날아왔는지, 누가 던졌는지도 모를 공이나 사물에 맞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넘어지는 것 또한 아차 하면 일어나는 일이라 몸 곳곳에 상처가 생기곤 했다. 예전이야 그냥 상처 그대로 두는 일도 많았지만, 지금은 어딘가 살짝 스치기만 해도 주저 없이 보건실로 향한다.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하면 너처럼 많이 다칠 수 있는 거냐? 물론 알려줘도 안 할 테지만.”

  “이 퍼펙트 가이도 다치고 싶어서 다치는 게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선생님 얼굴도 보고, 나는 좋은데.”

  “……말이나 못 하면. 그냥 다치지 말라고. 안 아픈 게 좋잖아.”

  “헤헤.”

 

 

  말은 모나게 해도 결국에는 항상 저렇게 걱정의 말을 해준다.

  수십 번의 슛 중의 하나가 골인하는 것처럼, 원래 모든 일이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안 되는 일투성이라 해도, 작은 성공하나가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게 사람을 고무시키고, 결국엔 노력하게 만들잖아. 쥬시마츠가 어려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공을 던져 지금의 그가 된 것처럼.

  …하지만, 어쩐지 선생님은 나에게 성공의 기쁨만을 주는 것 같았다. 선생님이 해주는 작은 걱정에 잠이 들기 전까지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고.

 

 

  “아 참, 선생님. 나 있잖아….”

  “너 뭐. 그렇지, 뭔가 마실래? 거기 냉장고 열어봐. 아무거나 꺼내 마셔. 그런데 뭐?”

  “오, 이 음료수! 내가 좋아하는 건데, 우연이군! 고마워, 잘 마실게. 선생님.”

  “…할 말이 뭐였는데.”

 

 

  평소에 즐겨 마시는 음료수가 웬일로 냉장고에 구비되어 있기에, 나는 기분 좋게 캔을 따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평소같이 한 모금 한 뒤 만족의 한숨을 내비치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책상 위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곤 그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부끄러운데.

 

 

  “뭐 별건 아니다. 나 이번에 계주에 참여하게 됐어. 1학년이 하는 2,000m 릴레이.”

  “네가? 너 잘 달리던가? 혹시 너희 반 사람이 부족한가?”

  “전혀 아니다! 이래 봬도 농구부라고!”

  “미안, 매일 달리다가 넘어지는 누구 씨가 생각나서. 허구한 날 보건실 들락거리며 치료를 받거든. 그 사람도 농구부였던가….”

 

 

  영 틀린 말은 아니기에 민망함이 앞서 뒷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들었다. 헛기침하며 이제는 많이 자란 앞머리를 빗는데, 선생님은 본격적으로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조금은 뾰로통하게 왜 웃는 거냐고 물었다. 그렇게 한참 웃던 선생님은 별안간 웃음을 지우고는 ‘넌 몰라도 돼.’하고 일축했다. 선생님이 몰라도 된다고 할 때는 너무 많았다. 지금 당장은 답답하지만, 언젠가 그 모든 순간의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게 막 문을 열려고 손을 뻗는데, 선생님이 말했다.

 

  “다른 곳 보지 말고 앞만 보고 뛰어. 한눈팔지 마. 빨리 달리다가 넘어지면 크게 다칠 수도 있으니까….”

  “응. 고마워.”

 

  나 진짜 한눈팔지 않을 거야. 한 사람, 아니 한 곳만 보고 달려야지.

 

 

 

**

 

 

 

  그냥 사람이 좋아서, 그러니까 단순하게 그 사람 정말 호감이다-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건 아무리 나라도 알고는 있었다. 평범한 남자 양호선생님이 애인이 없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쁜 이유가 별다를 게 없지 않은가. 하지만 역시 내가 조금 ‘심각하게’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다는 자각이 생긴 것은 체육대회 날이었다.

 

  체육대회를 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구름 하나 없이 화창한 하늘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트이게 했다.

  어느 누구는 자신을 향한 우렁찬 함성과 응원구호로 사기가 북돋아져 신발 끈을 세게 조였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나의 사기를 올려주는 건 본부석 옆 간이로 차려진 천막 아래 심드렁하게 앉아있는 남자의 몫이었다.

  문제는 모처럼 보건실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종일 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내가 들뜸을 가라앉히지 못했다는 건데, 오전 행사부터 그 이후로도 내내 눈이 나도 모르게 그리로 향하는 바람에 나는 많은 게임에서 반 친구들의 질타를 받았어야 했다.

 

  그러다가 그가 앉아있는 천막으로 조금이라도 아픈 학생들이 찾자, 이상한 질투심이 배를 당기게 해 기어코 당황하고야 말았다. 이 정도로 속이 좁은 남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다친 학생이 치료를 받는다는 극히 평범한 광경을 보면서도 나는 체육대회고 뭐고 그의 옆에 앉아있어야 할 건 나여야 한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당연하게도 좋지 못한 플레이의 연속이었다. 정신을 놓고 힘을 잘못 주는 바람에 줄다리기하다가 손목을 삐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선생님에게로 걸어가는 걸음이 점점 가벼워져 혼잡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본부석에 가는 것은 아주 금방이었다.

 

 

  “선생님! 나 아프다!”

  “소리 안 질러도 알아. 안 그래도 종일 시끄러워 죽겠는데 말이지.”

  “미안! 근데 아파!”

  “그래. 알았으니까 손목 이리 내.”

  “…내가 손목 아픈지 어떻게 알았어?”

 

 

  손목을 달라는 말을 하기 전부터 스프레이형 파스를 흔들던 선생님은 별안간 말이 없어졌다. 그저 말없이 내 손을 가져가서는 살짝 부은 손목을 살펴보다 차가운 파스를 뿌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침묵에 나름대로 최대한으로 겸손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봐줬구나, 나를. 맞지?”

  “…아니. 그냥 손목이 아파 보였어. 다 됐으니까 가.”

  “선생님 얼굴 빨개. 지금 하나도 안 더운데.”

 

 

  내가 키득대며 멀쩡한 손을 들어 손부채 질을 해주자, 선생님의 얼굴은 정말 걷잡을 수 없이 붉어졌다. 주먹으로 입을 막고는 조그맣게 하는 소리가 ‘그냥 우연히 본 거야, 우연히.’ 라니, 나는 다 큰 성인 남자가 정말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건지 잠시나마 고민을 해야 했다.

 

  그나마 다리나 발목을 다친 것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체육대회의 꽃인 계주는 잠시 후였고, 하나둘 계주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모이는 것을 보고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천막을 나왔다.

 

 

  “마츠노.”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일어났었는지 팔짱을 끼곤 천막 기둥에 기댄 선생님이 있었다. 내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자, 선생님은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어 안경을 벗고 그것을 가운으로 문질러 닦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조심히.”

  “…응.”

 

 

  초점이 안 맞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 짓는 선생님의 모습이, 어쩐지 돌아가는 길에도 아른아른 잔상처럼 남아, 영 멈추지 않고 두근대는 가슴께를 문지르며 조심히 뛰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하고 열심히 생각했다.

 

 

 

  선수들끼리 모여 주의사항을 듣고, 최종적으로 배턴을 넘겨받는 시뮬레이션을 했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도 부담이 되는 일이지만 마지막 주자가 아니길 천만다행이었다. 반에서 조금 달린다 하는 학생들과 모여 릴레이 순서를 정할 때, 초반에 속도를 내서 격차를 내자는 의견과 마지막 스퍼트를 노리는 의견 두 가지로 나뉘었었다. 물론 나는 릴레이 주자긴 했지만, 사전에 모의로 달려봤을 때 부끄럽게도 같은 주자 중에선 꼴찌였기 때문에, 정해지는 의견에 따라 나의 순서가 첫 번째가 되거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첫 번째 주자가 됐다. 둘 다 떨리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순위를 결정짓는 느낌이 더 큰 마지막 주자가 아닌 것에 대해 어찌나 감사했던지, 할 수 있는 거라곤 나의 다음 주자들이 더 빨리 발을 놀려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스타트 라인에서 신발 끈을 다시 한번 조여매고, 배턴을 고쳐 잡았다.

  준비 자세를 잡고 긴장을 풀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기를 잠시, 드디어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살면서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몇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의 경험들이 무색하게 있는 힘껏 다리를 움직였다. 온 힘을 다해 땅을 박찼다. 심장의 박동과 관중의 함성이 맞물려 공명하는 듯, 그 과격한 울림에 오히려 호흡이 없어진 것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

  코너를 돌 땐 살짝 몸의 축이 무너질 뻔하며 휘청거렸지만,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얼마큼 달렸을까, 저 멀리 다음 주자가 배턴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중등부에선 육상을 했었다고 한 친구였다. 잘 달려줄 것이다.

  저기까지만, 저기까지만 더 힘내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선생님일까?

 

  트랙 말고는 보이지 않던 시야에, 그 찰나의 순간에, 모든 것을 정지시킨 듯 아주 느리게, 초조한 듯 입을 가리고 서 있는 선생님이 왜 보였을까. 나는 알 수 있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선생님이 정말 드물게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사실 숱한 밤을 고민에 싸여 잠들지 못할 때, 만일 내가 그날 일찍 일어나지 않고 지각을 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등교를 했다면-하고 가정을 해 본 적이 있었다. 느지막이 집에서 나와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가장 빠른 길로 학교에 뛰어가고, 아무도 모르게 길고양이를 보살피는 그 다정한 모습을 보지 않았을 때. 어색한 발끝을 보며 쥬시마츠가 말한 첫사랑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다면. 농구부에는 들었어도 주의를 기울여 공 때문에 넘어지지 않았을 때. 자잘하게 계속 다쳐도 이 정도는 남자의 훈장이라며 보건실에 가지 않고, 혹여 간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감정 없이 선생님을…….

 

 

  “그럴…리가, 없잖아…!”

 

 

  아슬아슬하게 다음 주자에게 배턴을 넘겨준 뒤, 나는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트랙에 엎드려서 터질 것 같은 폐부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보려 했지만 넘어지며 근육이 놀랐는지 다리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다른 사람들의 발길에 치일 수도 있겠다고 걱정을 하던 차에, 누군가에게 몸이 들려 트랙을 벗어 날 수 있었다.

 

  빠르게 이동하는 탓에 단단히 얽매인 몸도 흔들린다.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고 얼굴에 닿는 부드러운 재질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를 들어 올린 다급한 손이 누구의 것인지를. 한참을 그렇게 눈을 감고 보건실에 눕혀질 때까지, 나는 영원 같은 그 순간을 만끽했다.

 

 

  “큰일이… 다칠 수도…! 왜 사람을 놀라게 해!”

  “후…. 서, 선생님. 나 이제 괜찮다.”

  “앞만 보라 했잖아, 거기서 나를 왜 보는데! 그거 잠깐 뛰면서 왜….”

 

 

  이제는 조금 화난 얼굴. 그래도 내가 숨 가쁘던 호흡을 갈무리하고 평온한 상태를 되찾으니 조금은 선생님도 진정한 모양이었다. 앞머리를 올려 머리를 긁적이던 선생님은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은 뒤, 넘어지며 찢어진 내 무릎을 살폈다. 빠른 손놀림으로 피를 섬세히 닦고 소독을 한 뒤 약까지 바르기 시작했다. 내가 조금 쓰라린 고통에 앓는 소리를 내자 잠시 손을 멈추고 혀를 차기도 했는데, 나는 여러 가지의 복잡한 감정 때문에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달리기는 계속할 텐데. 이렇게 들어와 있어도 되나.”

  “…알 게 뭐야. 너처럼 멍청하게 또 넘어지는 놈 있으면 누가 부축해서 데려오겠지.”

  “그럼 나는 왜 데리고 와줬어?”

  “그러니까 알 게 뭐야, 네가.”

 

 

  나도 다 알고 싶단 말이야. 왜 내가 어쩌다 선생님을 좋아하게 됐는지, 이렇게 특별대우라도 받으면 왜 미칠 듯이 기분이 좋은지. 밴드를 붙이면서 선생님은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손을 댔는데, 내가 좀 전에 앓는 소리를 냈기에 그런 것 같았다. 나는 또다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마음에 이번에는 어색하지 않고 진심으로 기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어? 선발주자가 돼서는 또 넘어져서 무릎이나 까지고. 나 같았으면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서 불탔을지도.”

  “그래도 열심히 달려서 후회는 없어. 이치마츠 선생님이 넘어지자마자 이렇게 데려와서 치료도 해주고, 또….”

  “그, 그러니까, 아니, 너 거기에 계속 누워있었으면 치료할 사람이 더 늘어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런 거야.”

  “이렇게 당황하는 선생님도 두 번이나 보고. 오늘은 참 럭키한 날이다.”

 

 

  목청껏 웃는 나 때문에 선생님은 아까의 부끄러움 또한 떠올렸는지 침대 옆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양손을 창틀에 올려두고, 고개를 숙여 한숨을 푹 쉬다 창밖을 내다본다.

  터지는 함성으로 예측해보건대 단거리 달리기가 시작한 듯 보였다. 선생님은 아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달린 계주도 이미 한참 전에 끝났겠지만, 다들 각자의 회포를 푸느냐고 나를 잊은 듯 보인다. 그래서 우리 반이 몇 등을 했는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

 

 

  나는 아무것에도 개의치 않았지만, 하얗게 펼쳐진 너른 등을 쳐다보다 목이 메었다. 많이 훔쳐본 탓에 너무나도 눈에 익은 등이었다. 선생님이 바라보는 창 하나를 기점으로 우리 둘은 고립됐다. 무언의 자발적인 고립이었다. 나는 가능한 오랜 시간을 선생님과 단둘이서 표류하고 싶었다. 높은 고도의 하늘을, 고요한 바다를, 알 수 없는 내 마음속을.

 

  더 참을 수 없다며 사랑을 고하는 드라마 속 대사가 왜 지금 다시 생각나는 걸까.

 

  지금인가? 나는 정말 지금 참을 수 없이 마음이 커서, 토해내는 것밖엔 방법이 없을까? 짙게도 무거운 감정이지만 나는 그 시기가 바로 지금인지에는 확신이 없었다.

 

 

  “…선생님. 있잖아,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되나?”

  “뭘.”

  “그냥 다. 확신 같은 거. 지금이 그때인지, 아직 아닌지….”

  “…….”

 

 

  한참 등을 보이던 선생님은 말없이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내심 돌아보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눈이 조금 붉어서, 또 내가 눈물이 나려 한다는 걸 선생님이 눈치챌 테니까. 차마 선생님의 눈을 쳐다보진 못했다. 선생님은 창을 등지고 서 있어, 역광 탓에 얼굴이 조금 어둡기도 했다. 굳게 닫힌 입술을 바라보며 초침이 지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른이 돼도… 어른이라도… 잘 몰라. 그런 거.”

  “…….”

  “그래도, 도저히 확신이 안 들면 물어봐. 나한테.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까 혼자 고민하지 말고….”

 

 

  선생님의 목소리에 나는 결국 참았던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내가 어른이 됐을 때도 모르면 어떻게 해 선생님? 이건 너무 무겁고, 그때는 너무 늦는단 말이야.

 

  하지만, 지금 내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있었다.

  너무나도 명확한 나머지 그 누구도, 하물며 선생님의 도움도 필요 없는 것.

 

  나 정말 선생님을 너무 좋아하나 봐. 내 첫사랑은 선생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

 

 

 

  그렇게 내가 2학년이 되고, 이후로도 더딜 것만 같았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켜켜이 쌓아 올린 감정이 무르익어 터질 때쯤 나는 그 ‘참을 수 없다’는 감정을 느끼며 고백했다. 아니, 하려 했다. 중간에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사실 아직도 그 우울함으로 보내온 공백의 시간을 생각하면 하염없이 아련함에 잠기곤 한다. 나의 파란만장한 짧은 인생에서 가장 언럭키하고 임퍼펙트한 하루하루였으니까! 어찌할 바 모르는 것은 둘째 치고 그 맛있는 카라아게도 쥬시마츠에게 양보할 정도였으니, 정말이지 내 인생의 가장 크나큰 슬픔의 시기이며 암흑기였던 것은 확실하다. 죽었다 깨어나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까 전부터 무슨 생각 하냐 물었지. 왜 삐져서 대답을 안 하는데?”

  “…별생각 안 했다. 그냥 뭐 첫사랑의 시작부터…그 성숙한 슬픔과 상처의 아픔이랄까….”

  “…잠깐. 말은 바로 해. 내가 너한테 언제 상처를 줬다고 그래.”

  “하항? 선생님 이상하다. 나 한 번도 선생님이 내 첫사랑이라고 말 한 적 없는데?”

 

 

  그러나… 보잘것없던 나의 고백은 아주 잠깐의 시간을 두고 내게 돌아왔다. 더없이 큰 떨림과 기쁨으로.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한다는 것은 얼마만큼 우연의 정성이 닿아야 하는 걸까. 나는 아직도 처음으로 선생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던 날을 잊지 못한다. 훗날, 그의 차 안에서 몸을 녹이며 그렇게 갑자기 이름으로 부르니 어색하지는 않았냐고 묻자, 정작 자신은 속으로 많이 불러와서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자각도 없었다고 했다. 뜻밖의 이야기에 속이 울렁거려, 이를 감추려 매고 있던 안전벨트를 꼭 붙잡고 치사하게 왜 내 이름을 혼자만 불러온 거냐며 칭얼댔었다. 그러자 그는 운전대에 엎드려 나를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라마츠. 카라마츠, 카라마츠…. 사실 뭔가 혼자 부르는 것도 아까웠다고 해야 하나…. 앞으로 듣고 싶을 때 말해. 원 없이 불러주지.’

 

  말을 마치고는 씩 웃는데, 그 모습에 뜨거운 속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선생님의 입술로 내 입술을 부딪혔던 것이 우리의 첫 입맞춤이었다. 과격하게 돌진한 탓에 선생님의 입술이 조금 터진 것은 비밀이지만.

  다시 시간이 흘러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체육 교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 입학을 한 이후로는 보고 싶다고 매일 볼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조금 더 각자의 삶의 영역이 나뉘어 그 방식에 적응해 나가는 중에, 다행히 선생님이 내가 다니는 대학 근처의 고등학교로 전근을 오게 되며 나는 매일같이 꿈에 그리던 그 얼굴을 손쉽게 마주할 수 있게 됐다.

 

 

  “정말 많이 컸다니까. 이렇게 재미없는 농담도 할 줄 알게 되고…. 그런데 진짜 내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나도 마시게 해줘. 나 이젠 쥬시마츠랑도 술 마시고 그래.”

  “아니지, 대답부터 해. 그리고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너랑 같이 술이라니, 말도 안 되지. 그랬다가 지옥에 떨어지는 건 아닌가. …그래,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래서 네 첫사랑이 누군데?”

  “말 안 할래. 그런데 선생님, 나랑 술도 못 마시면 같이 살 땐 어떻게 하려고 그래.”

  “푸웁!”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생님은 마시던 맥주를 뿜고 말았다. 겨우 든 술잔을 내려두고 소매로 입을 벅벅 닦는데, 목 위까지 올라온 검은색 니트의 끝에서부터 서서히 불이 붙는다. 순식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변한 선생님은 눈을 핏발이라도 설 것처럼 크게 뜬 뒤 감지도 못했다.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가 목적지를 잃고 배회하며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내 비추는 탓에, 나는 그게 너무 귀여워 선생님이 내려둔 술잔에 입을 대며 태평하게 이야기했다.

 

 

  “으음? 아니었나? 같이 살 생각이었잖아. 그러니까 새로 구한 집 방들이 어떻고, 화장실이 어떻고, 햇볕이 얼마나 잘 드는지 이불이 잘 마른다며 자랑하던 거 아니었어? 난 그래서 같이 살자는 줄 알았다. 뭐, 싫으면 말고. 아- 시원하군.”

  “…아니, 아, 그러니까. 그게….”

  “나는 괜찮다. 샤이한 선생님이 끝까지 혼자를 고집한다면… 눈물을 머금고 놓아주는 수밖엔….”

  “무슨 소리야! 같이 살아! 같이 살자! 같이 살면 되잖아. 놓아주기는 무슨, 꿈도 꾸지 마. 그러니까, 내,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당황해서….”

 

 

  아, 너무 좋아. 예전부터 나는 선생님의 당황한 얼굴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항상 무심한 듯 포커페이스인 남자가 얼굴이 붉어지며 땀을 흘리면 그것만큼 속이 간지러운 것이 또 없었다. 나는 얼굴이 무너지게 웃다, 선생님이 미처 닦지 못한 안경을 벗겨 옷소매로 닦아 주며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오늘도 내가 살 집 구경 안 시켜 줄 거야?

 

 

  곧 함께 살게 될 집이자 처음으로 선생님의 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문득 감회가 새로워져 중간중간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나같이 행복한 사람이 더 있을 수 있을까.

  어찌 보면 짧았던 우리의 시간이 한계 없이 늘어갈 것에 대한 기분 좋은 두려움이 엄습한 것이다. 내가 어쩐지 울컥하는 것을 감추지 못하자, 선생님은 말없이 내 손을 이끌어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서 깍지를 끼워주었다. 아,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 나와 함께하다니,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역시 나는 길티가이이자 럭키가이 인 것이다…….

 

  물론, 한껏 젖은 감흥에서 깨어 나올 수 있었던 건, 소심하지만 다급해 보이는 선생님의 지속적인 물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첫사랑이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누군데. 아니, 이름만 말해봐… 아무 짓 안 하고 알기만 할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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