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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싫습니다."

   가을 풍경은 아카츠카 재단의 얼마 안 되는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교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소담스럽게 피어난 단풍은 멀리서 보아도 제법 아름다웠다. 은은한 꽃 향기와 색색깔로 물든 길을 지날 때면 따스한 햇살이 머리칼을 어루만져왔다. 그 손길을 받은 후에는 세상 만사 귀찮아보이던 양호 교사도 나른한 얼굴로 변하고 말았다. 칙칙해보이는 양호실 역시 창문을 연 뒤에는 밝고 산뜻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바람은 종종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와 하얀 커튼을 나부끼게 했다. 그 뒤를 따라 매일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오고 갔는데, 오늘은 도리어 한 사람의 목소리가 새어나가는 중이었다.

   "아아, 이치마츠 선생님!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생각해봐요, 네?"

   토도마츠의 볼멘소리가 양호실에 크게 울려퍼졌다. 이치마츠는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최대한 모르는 체를 했다. 분홍빛 옷을 즐겨입는 사회 교사는 상냥한 태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끈질김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치마츠는 자신이 그 점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라는 사실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토도마츠는 언젠가부터 양호실에 찾아와 한탄이나 푸념 따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치마츠가 입이 무겁고 발이 넓지 않다는 것을 익히 알기 때문이었다. 그 행태를 여태까지 참고 있었던 이유에는 이치마츠의 소심한 성격도 한 몫 하고 있었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진정하고 돌아갈 때까지 이치마츠가 해야 할 일은 그저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제발 한 번만! 딱 한 번만 같이 해주시면 더는 이런 부탁 안 할게요."

   토도마츠는 하루에만 벌써 세 번째 찾아온 참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선생님이랑 하시라니까요."

   "말씀드렸잖아요! 원래 쥬시마츠 선생님이랑 하려고 했었는데, 저희 취향이 정말 끝장나게 안 맞는다니까요. 저랑 해 주실 분은 이치마츠 선생님밖에 없어요."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어 살펴보니 어느새 흰 가운 자락이 붙잡힌 채였다. 팔걸이마저 붙잡히자 더 이상 몸을 돌릴 수조차 없었다. 이치마츠는 필사적으로 글썽이는 눈망울을 피했다.

토도마츠의 부탁은 다름 아닌 '학교 축제 무대에서 노래 부르기' 였다. 예년과는 다르게 학생, 교사 모두가 참가할 수 있는 장기 자랑 무대는 한 달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이목을 끈 것은 무대 자체보다도 그에 걸려 있는 상품이었는데, 1위에게는 무려 디즈니랜드 티켓 2장이 주어졌다. 축제를 2주 앞둔 시점에서는 이미 여러 팀들이 승리를 위해 피 나는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물론 음침한 양호 교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었기에, 이치마츠의 역할은 위층 음악실에서 소음이 들려올 때마다 귀마개를 쓰는 것이 전부였다. 누군가가 이틀 전 대뜸 양호실에 들이닥치지만 않았더라면, 그 안온한 일상은 변하지 않았을 참이었다.

   "제가 정말.. 교사로서 이런 짓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토도마츠는 갑작스럽게 핸드폰을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 이치마츠는 그가 드디어 폭력적인 속내를 드러내는 줄로만 알고 눈을 질끈 감았다. 찰나의 순간 직장 의료 보험의 보상 범위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코뼈 위로 다가오는 물리적 충격은 없었다. 슬쩍 눈을 뜨자 까맣던 화면에 떠오른 사진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이치마츠는 게슴츠레하게 띄웠던 눈꺼풀을 삽시간에 밀어냈다. 파란 옷을 입은 학생이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본래 사이즈에서 크게 확대한 탓에 화질이 선명치 않았지만, 그 이목구비만은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이치마츠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자 토도마츠는 재빨리 핸드폰을 거뒀다.

   "이거, 저번 소풍 때 찍은 우리 반 단체 사진인데. 사람 수를 잘못 계산해서 한 장 더 나왔거든요. 협력해주신다면야 드릴 수도 있고."

   "...그런 수작은.."

   "정 싫으시면 버리죠, 뭐. 갈기갈기 찢어서."

   " ! "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이치마츠는 그만 눈을 꼭 감고 말았다. 새카만 시야에 방금 봤던 얼굴이 어른거렸다. 욕망의 검은 그림자가 뇌리에서 널을 뛰었다. 하지만 아무리 쓰레기같은 인간일지라도 도를 넘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싫습니다."

   "선생님은 같이 셀카 찍은 적 없으시죠?"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토도마츠는 이미 도를 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급히 핸드폰을 뒤지는 손길에 언뜻 광기가 서려있는 듯 했다. 이치마츠는 그의 집념에 약간의 두려움마저 느꼈다. 또다시 코앞으로 다가온 화면에는 토도마츠 옆에서 활짝 웃고 있는 한 학생이 보였다. 이번에도 손이 먼저 나간 것은 결코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이거 말고도 더 있어요. 얘가 얼마나 포즈를 예쁘게 잡는지 아세요?"

   토도마츠는 뻗어진 손을 피해 이리저리 핸드폰을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화면이 보이게끔 이치마츠를 향해 기울이는 솜씨가 과연 수준급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눈에 담고 나면 더 이상 욕심이 나지 않을 것만 같은데, 토도마츠는 쉽사리 그 영광을 손에 쥐여주지 않았다. 한참 동안 두 손 두 발을 허우적대던 이치마츠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요.. 합니다, 해."

   "야호! 역시 이치마츠 선생님밖에 없다니까요!"

   벌겋게 달아올랐던 눈동자가 금세 호선을 그렸다. 이치마츠는 토도마츠가 양호실을 펄쩍이며 뛰어다니는 동안 그의 손아귀를 가만히 응시했다. 가까이 다가올 때 낚아챌 생각이었지만, 그는 어쩐지 온 양호실을 돌아다니면서도 이치마츠의 근처에는 오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날렵하고 미끈한 신형 핸드폰을 뚫어질 정도로 노려보았다. 물론 소용 없는 짓이었다.

   "그럼 오늘 방과 후부터 연습하기로 해요!"

   토도마츠는 기어코 한 쪽 발을 앙증맞게 들어올리며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뒤로 이치마츠가 30분 가량 제 이마를 내려치고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양호실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 했다. 

   "티처, 요새 얼굴 보기가 힘들군."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평소에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시침과 분침은 노예 계약을 한 이후부터 너무나도 빠르게 가기 시작했다. 믿겨지지 않는 현실에 이치마츠는 핸드폰과 양호실 시계를 비교해본 적도 있었다. 건전지를 두 번이나 갈아끼운 끝에 이치마츠는 토도마츠가 시계에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토도마츠는 일 주일 동안 4시 30분이 될 때마다 정확하게 양호실에 찾아와 이치마츠를 끌고 나갔다. 구관의 버려진 동아리실에 들어설 때마다 이치마츠는 감옥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떨치지 못 했다. 2시간의 연습이 끝나고 나면 푸석했던 양호 교사는 마른 멸치가 되어 복도를 기었다. 힘겨운 하루하루는 끝내 이치마츠가 카라마츠를 앞에 두고서도 웃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럴 일이 좀 있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털어놓아도 된다. 티처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

   "너 그런 말을 잘도 하는구나."

   카라마츠는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이치마츠는 사납게 삐죽이는 얼굴을 뒤로 한 채 서류 작업에 몰두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으니, 보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누적된 피로는 기력과 감정을 둔하게 만들었다. 일상적인 업무도 겨우 처리해내는 처지에 누군가를 그리워할 여력은 이치마츠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티처 엄청 보고 싶었는데.. 티처는 아니었나봐."

   시무룩한 목소리에 뒤를 돌자 고개를 푹 숙인 카라마츠가 보였다. 이치마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카라마츠의 머리칼 위에 손을 얹었다. 서투른 손길 아래로 움찔거리는 모양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뒷머리를 쓸어넘기자 부루퉁한 얼굴이 위로 떠올랐다. 살짝 부풀어오른 볼에 앳된 홍조가 감돌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한 손으로 발간 뺨을 쓸어내리고 싶은 것을 힘겹게 참았다.

   "마츠노. 너도 축제 참가해?"

   "응?"

   모로 휘었던 눈썹이 동그랗게 사그라들었다. 제법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던 표정은 금세 순한 아이의 것으로 변했다. 이치마츠는 눈가에 입을  맞추는 대신 머리카락을 좀 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당연하지. 반 친구들이 무대에 나간다고 해서.. 설마 티처도 오는거야?"

   "어.. 응. 그렇게 됐어."

   "정말? 그럼 만날 수 있는건가?"

   "그래, 뭐.. 그렇지."

   반짝이던 얼굴이 순식간에 밝게 피어났다. 카라마츠는 언제 화를 냈냐는 것처럼 히죽이며 웃었다. 이치마츠는 다소 복잡한 심정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엄밀히 말해 거짓은 아니었지만 속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카라마츠는 내내 헤실거리다가 표정을 채 갈무리하지도 못 하고 일어났다. 미소가 입술을 타고 달게 흘러내렸다.

   "축제 날까지 기다리도록 하겠다, 티처!"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문 밖을 나설 때까지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점심 시간이 지났으니 3시간 가량이 지나면 또다시 연습을 하러 가야 했다. 곡을 떠올리자 흰 피부가 귀 끝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이치마츠가 연습을 하며 누구를 떠올리는지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았다. 그럼에도 앞선 부끄러움이 열기를 몰고 왔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쓰다듬던 손에 이마를 묻어 아무도 보지 않는 얼굴을 가렸다.

그립지 않았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다.

   다리 떨기는 이치마츠가 아주 오래 전에 고쳤던 습관 중 하나였다. 최근에는 다리를 떠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말도 많이 나오고 있었으나, 애초에 건강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불안을 해소하려던 방식이 오히려 남의 이목을 더 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이치마츠는 최대한 얌전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굽은 등과 허리는 고치지 못했지만, 다리만큼은 곱게 모아 앉는 습관을 들일 수 있었다. 이치마츠 나름대로는 몇 년의 노력 끝에 얻은 결실이었다.

   "선생님, 제발 다리 좀 그만 떠세요."

   그 노력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었다. 

   양 옆으로 추켜세운 다리가 쉴새없이 흔들렸다. 토도마츠의 힐난에도 이치마츠는 도저히 두 다리를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정수리에서부터 척추로 밀려내려오는 긴장을 어떻게든 해소할 방법이 필요했다. 무대 뒤 대기실에 들어섰을 때부터 흔들어댄 탓에 발바닥이 저려왔다. 한 팀씩 호명이 될 때마다 이치마츠의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기어이 손톱까지 씹어대기 시작한 모습에 토도마츠는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이치마츠와 토도마츠의 순서는 정확히 중간이었다. 참가하는 인원이 제법 많아 대기 시간도 길었지만, 그렇다고 순서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앞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가자 하얀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너무나도 빠르게 뛰어 입으로 뱉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바지를 벗고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토도마츠의 눈이 시퍼렇게 빛나는 탓에 대기실조차 벗어날 수가 없었다. 

   "우리 벌써 다음 차례에요. 나갈 준비 해야죠."

   "선생님.. 저희 그냥 안 하면 안 될까요."

   "네, 안 돼요. 얼른 일어나세요."

   이치마츠는 최대한 가련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였으나 토도마츠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목덜미를 잡아채가는 손길에 억지로 끌려나가야 했다. 걷기보다는 땅바닥을 기어가는 것에 가까운 모양새에 토도마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만 잘 해주시면 약속했던대로 사진 보내드릴게요. 그러니까 일어나세요."

   그 말 한 마디에 이치마츠는 허리를 곧게 폈다. 

   한심스러운 작태에 미세하게 살아있던 양심 한 구석이 요동을 쳤다. 그러나 이치마츠가 오직 사진 때문에 토도마츠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평소라면 절대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일인만큼, 제안을 구실 삼아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이치마츠는 반짝이는 얼굴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마츠노 선생님, 올라와주세요!"

   계단을 오르자 웅성이는 소리가 한결 더 크게 들려왔다. 토도마츠는 한 손에 기타를 든 채 망설임 없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 몇몇 학생들의 비명 섞인 호응이 강당을 울렸다. 태연하게 흔들어 보이는 손 너머로 치켜세운 눈초리가 뒤를 향했다. 이치마츠는 심호흡 끝에 발을 내딛었다. 머리 위로 새하얀 조명이 쏟아져내렸다. 희뿌옇게 이지러지는 시야에 앉을 의자만이 간신히 보였다. 모든 소리가 한데 뭉쳐 먹먹한 소음으로 귀에 다가왔다. 객석에서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겨우 제 자리에 선 뒤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박수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손바닥 안으로 땀이 배어나왔다. 토도마츠가 기타를 조율하는 동안, 이치마츠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객석을 훑어보았다. 눈동자가 마주치기 전에 급히 피하는 것을 반복할수록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눈 앞이 또 다시 일그러지려는 순간, 이치마츠는 마침내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서도 반짝이는 눈동자는 어김없이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대 위로 달려올 것처럼 흥분해서 들썩거리는 모습에 이치마츠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카라마츠는 활짝 웃으며 두 주먹을 쥐어보였다. 힘내라는 듯한 제스처에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이치마츠 선생님!

   튜닝을 마친 토도마츠가 마이크를 건넸다. 손가락 끝에서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멈추고 또 흘러갔다. 전주를 들으며 이치마츠는 눈을 느리게 감고 떴다. 선명해진 시야에 단 한 사람만이 보였다.

 

어디에선가 종이 울리고
멋쩍은 말들만 떠오르고
추위에 기분이 좋아져
어라, 왜 사랑 같은 걸 하고 있는걸까
성스러운 밤이라고 반복하는 노래와
일부러 반짝이는 거리 때문일까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횟수가
보지 못하면 아파오는 가슴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주려고 해
나도 알고 있어, 그런 거
산타에게 부탁해도 소용 없겠지

가능하면 옆에 있어줬으면 해서
아무데도 가지 않아줬으면 해서
오직 나만을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그래도 이런 말 하는 건 창피한데다
길어지기만 하니까 이만 줄일게
너를 좋아해 

 

   이치마츠는 어느새 자신이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주를 틈타 익숙한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자 자그마한 얼굴이 나타났다. 미소를 지어보이는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노래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들떠있던 카라마츠가 어느새 울상을 짓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당황한 나머지 마이크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당장이라도 아래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반주는 너무나도 짧았다. 이치마츠는 멈칫거리며 입술을 열었다. 겨우 박자를 맞춘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지, 아니면 제대로 부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절을 부르면서도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서 차마 시선을 떼지 못 했다. 노래를 부를수록 카라마츠는 점점 더 울먹이는 얼굴이 되었다. 애타는 마음에 또다시 식은땀이 흘렀다. 수없이 연습해 이미 외워버린 노래가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후렴구를 읊던 중에 카라마츠는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가는 뒷모습에도 이치마츠는 그저 앉아있을 뿐이었다. 강당을 나서는 등 뒤로 마지막 구절이 흘러나왔다.

 

들릴 때까지 몇 번이고 말할게
너를 좋아해

 

 

 

 

 

   축제의 열기는 하룻밤 사이에 막을 내렸다. 학교는 빠르게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알록달록한 포스터와 현수막 따위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이치마츠는 간만에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출근했다. 점심 시간이 되어도 위층의 음악실은 조용했고, 연습을 하자며 찾아오는 이 또한 없었다. 이치마츠는 느긋한 평화를 즐기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새 창 밖의 단풍이 모두 져버린 것은 아쉬웠지만,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모든 일상이 제자리로 돌아온 가운데 단 하나 달라진 것이 있었다. 

   대망의 디즈니랜드 티켓은 쥬시마츠와 밴드 동아리에게로 돌아갔다. 쥬시마츠는 토도마츠와 이치마츠의 바로 뒷 순서였고, 이치마츠는 배신자라며 험하게 삿대질을 하는 토도마츠를 질질 끌고 돌아가야 했다. 이어진 무대에서 노란 브릿지를 달고 일렉 기타를 휘두르는 모습은 단연코 압도적이었다.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뛰어오르기 시작하자 토도마츠는 대놓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앞선 무대를 다들 잊어버릴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치마츠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무대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단 한 명으로 족했다. 

   이치마츠는 시상식 중간에 강당을 빠져나왔다. 뒤늦게 학교 주변과 양호실, 교실마저 찾아보았지만 카라마츠는 보이지 않았다. 창문 끝에 걸려있던 붉은 저녁 노을이 점점 검푸르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어두운 복도를 빠져나왔다. 양호실로 돌아가는 와중에 어깨를 잡아오는 손길이 있었다.

 

   "이치마츠 선생님! 대체 어딜 갔나 했네."

   급히 달려온건지 토도마츠는 숨을 헐떡이며 호흡을 골랐다. 이치마츠는 그가 진정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겨우 허리를 편 토도마츠가 건네준 것은 작은 봉투 두 장이었다.

   "..이게 뭡니까?"

   "먼저 갔으니까 모르지! 우리도 상 받았어요. 한 3위였던가."

   봉투 안에는 디즈니랜드 대신 아쿠아리움 티켓이 들어있었다. 이치마츠는 눈동자만 올려 토도마츠를 빤히 바라보았다. 1위를 한다면 사진을 받는 대신 티켓은 넘겨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의문이 담긴 시선에 토도마츠는 손을 내저었다. 

   "전 수족관은 별로에요. 그냥 선생님 다녀오세요."

   "..."

   "아, 사진도 드릴테니까 걱정 마시구요."

   "됐습니다."

   "네?"

   토도마츠는 핸드폰을 꺼내다 만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치마츠를 바라보았다. 역전된 상황에 이치마츠는 그저 고개를 돌렸다. 왠지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사진이야 뭐, 제가 찍으면 되죠."

   토도마츠의 비웃음과 놀림에서 힘겹게 사수해낸 티켓은 이치마츠의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근무 시간 내내 책상 구석을 힐끔거리던 이치마츠는 마침내 1분에 한 번씩 시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2주일 동안 빠르게 지나가던 시간은 또다시 느리게 흘러갔다. 시침이 4를 지난 순간부터 이치마츠는 양호실 안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걸었다. 30분이 더 지난 뒤에야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치마츠는 서둘러 의자에 앉으며 들어오라고 말했다. 문이 열리는 동안 티켓을 더 잘 보이는 자리에 옮겨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티처."

   "마츠노."

   주저하며 들어선 카라마츠는 답지 않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여전히 풀 죽어보이는 모습이었다. 이치마츠는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전날밤 세운 계획이 다시금 머릿속에 펼쳐졌다. 먼저 어제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유를 부드럽게 물어보고, 자연스럽게 아쿠아리움에 가자고 제안을 하면 끝이었다. 카라마츠가 수락하면 그 곳에서 함께 사진을 찍을 수도 있을 터였다. 이치마츠로서는 세 가지를 한꺼번에 얻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시뮬레이션을 끝낸 이치마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무슨 얘긴데?"

   이치마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카라마츠의 표정이 제법 심각했기 때문에 이치마츠는 계획을 뒤로 미뤄놓았다. 카라마츠는 눈을 밑으로 내리깐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한참을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이 마침내 흰 가운 자락을 붙잡았다. 이치마츠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주한 얼굴은 어딘가 단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귀 끝이 붉어져 있었다. 

   "티처.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지 마."

   "어.. 왜?"

   그렇게 별로였나. 덩달아 붉어졌던 얼굴에서 열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뒤늦은 민망함이 뒷목을 타고 올라왔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느꼈던 감정이 다시금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이치마츠는 절박하게 카라마츠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여하에 따라 오늘 입은 바지의 운명이 결정될 터였다. 방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카라마츠는 또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망설임 끝에 나온 대답은 아주 작아서 이치마츠는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너무..."

   "응?"

   "... ..티처는 바보 멍청이다!!"

   우렁찬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양호실을 울렸다. 몸을 기울이고 있던 이치마츠는 그 기세에 의자 밑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고개를 들자 새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리는 카라마츠가 있었다. 이치마츠는 대체 자신이 뭘 잘못한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한참을 그대로 서 있던 카라마츠는 쿵쿵거리며 양호실을 나섰다. 얼마나 문을 세게 닫았는지 침대에 달린 커튼마저 파르르 떨렸다. 카라마츠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즈음에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트러진 책상 위에 반쯤 열린 봉투가 보였다. 

  이치마츠는 두 번 다시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길게 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축제의 마지막 순서인 공연 무대가 시작된 지 20분이 지난 뒤였다. 강당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관객의 대부분은 학생들이었지만, 몇몇 교사들도 함께 앉아 공연을 보는 중이었다. 낯익은 얼굴들 사이를 수십 번이나 훑어보았으나 이치마츠는 머리털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반대편에 있어 만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카라마츠는 일어나고 싶어 들썩이는 몸을 겨우 내리눌렀다. 이치마츠와 함께 즐길 축제를 지난 일 주일 내내 기대해온 참이었다. 어느새 여러 팀이 오르고 내려갔지만 도저히 공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가 멀리 떨어진 오른쪽 구석을 스무 번째로 노려보는 동안, 무대에서는 사회자가 나와 다음 순서를 호명했다.

   "마츠노 선생님, 올라와주세요!"

   익숙한 이름에 카라마츠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여느 때처럼 분홍색 가디건을 차려입은 토도마츠가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오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담임 선생님이 참여한다고 했던 것을 깨달은 카라마츠는 뒤늦게 박수를 쳤다. 전날 종례 시간에도 꼭 크게 호응을 해달라며 몇 번이고 당부했던 차였다. 그래도 톳티 선생님이니까 잘 봐둬야지. 카라마츠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앞을 바라보았다. 손을 흔들며 몇 번이고 인사를 한 토도마츠는 어쩐지 자리에 앉지 않고 무대 뒤를 응시하고 있었다. 누가 있는건지 궁금해 고개가 기울어지던 순간, 무척이나 주저하는 발걸음이 계단 위를 올랐다.

   무대에 등장한 사람은 카라마츠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이치마츠였다. 발 끝에 걸친 슬리퍼는 평소와 같았지만, 보라색 니트와 그 안에 받쳐입은 셔츠는 제법 단정했다. 카라마츠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가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땅 밑을 기던 심장이 순식간에 세차게 뛰어올랐다. 속상하고 서운했던 마음도 잊고서,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열렬하게 박수 갈채를 보냈다. 느릿한 시선이 객석을 훑는 동안 카라마츠는 손을 흔들어보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눈이 마주치기까지는 아주 짧고도 긴 시간이 걸렸다. 반쯤 감긴 눈동자에 카라마츠는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어보였다. 웃음이 자꾸만 눈썹과 입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마이크를 쥔 손가락은 하얗고 길었다. 토도마츠의 반주가 시작되자 이치마츠는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곧 눈을 감았다. 흰 조명 아래에서 얇은 눈썹 끝에 빛 조각이 반짝였다. 넋 놓고 앞을 바라보던 카라마츠는 들려오는 노래에 정신을 차렸다. 기타 선율 위로 나직하게 흐르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또 감미로웠다. 수십, 수백 번도 더 들었던 소리가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카라마츠는 호흡마저 멈춰가며 귀를 기울였다. 한 손으로 거머쥔 마이크와 붉은 입술, 내려감긴 눈가 중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어느새 따스하게 달아오른 손가락이 서로를 감싸고 뜻모를 긴장을 억눌렀다. 노래가 한참 후렴구에 다다를 즈음, 카라마츠의 귀에 문득 소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치마츠 선생님, 되게 잘생겨보인다."

   "그러게. 어두침침한 줄만 알았는데.."

   옆을 돌아보자 같은 반의 여자 아이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카라마츠는 갑자기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다시 앞을 보자 이치마츠는 여전히 노래에 집중하고 있었다. 반주가 흐를 때까지만 해도 얼굴에 가득했던 긴장은 어느새 사라진 채였다. 언뜻 한 가지 의문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매우 꺼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토도마츠가 단순히 부탁만 했다면 이치마츠는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가 무대에 오른 건 용기를 낼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터였다. 카라마츠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1절이 끝나자 이치마츠는 눈을 떴다. 시선이 마주쳤지만 카라마츠는 더 이상 웃어보일 수가 없었다. 살짝 미끄러진 마이크가 곧 양손에 잡혔다. 반주가 끝나고 2절이 시작되었는데도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분명히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도,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마츠노, 왜 그래. 어디 아파?

   무뚝뚝한 것처럼 행동해도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 눈동자를 볼수록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올라 눈가에 고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카라마츠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가는 중에도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강당 문을 열 적에 어렴풋이 마지막 구절이 들렸다.

내게 불러주는 노래였다면 좋았을텐데.

카라마츠는 힘껏 운동장을 달렸다.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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