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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체육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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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단은 지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이었다.

  옆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남학생 아무개가 후배인 1학년 여학생을 임신시켰는데, 그는 이미 같은 학년에 꽤 오래 교제를 한 여자 친구가 있었다. 분노에 찬 아무개의 여자 친구는 임신했었던 여학생이 사후 몸을 추스르자마자 그녀를 포함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아무개를 집단폭행하기에 이르렀다. 복수는 꽤 잔인하게 들어맞아, 아무개는 이후로도 꽤 오래 병실 신세를 져야 했다. 이 폭행 사건이 수면 위로 처음 오른 뒤 그 내막까지 자세히 드러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이로 인해 사건을 은폐하려던 해당 학교를 필두로 윗선인 지자체까지 한바탕 큰 소동이 일어났다. 안 그래도 사회문제로 청소년들의 성 관념과 윤리의식이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모종의 사건은 분진이 자욱이 낀 밀폐공간에 불씨를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부임 동기인 토도마츠 선생이 호들갑을 떨며 내게 이 사건을 알려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무심하게 커피를 홀짝이며 ‘그렇습니까.’ 따위를 지껄이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응징은 너무 가볍게 끝났다며, 나 같았으면- 하고 말을 잇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요즘 애들 너무 무섭네.’ 하고 가볍게 대꾸했었다. 그 소동의 파장이 학교의 미물처럼 존재하는 내게까지 미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예측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방어는 존재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지금. 갑자기 불려온 교무회의에서 나는 진땀을 빼고 있었다.

 

 

  “공문이 내려왔어요. 각 학교 차원에서 제대로 된 성교육을 시행하라고 말입니다. 크흠. 제대로 된 성교육이라니, 이 무슨 망측한.”

 

 

  교감의 얼굴은 이미 피가 쏠려 불그죽죽했다. 항상 이해하지 못할 지점에서 크게 흥분하는 이상한 인간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가 어디까지 떠올리고 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나는 손톱 옆에 일어난 거스러미를 뜯으며 전에 들었던 토도마츠의 말에 조용히 동감을 하고 있었다. 교감은 항상 가지고 다니는 혈압약 대신 심리 상담이 필요하다는 의견.

 

 

  “아무튼, 단체 성교육을 진행할까 합니다. 성교육 강사님을 초빙할 예정이에요. 강사, 강사님 말입니다. 흠흠!”

 

 

  말까지 떨고, 계속해서 헛기침하는 교감의 눈초리를 무시하는 차였다. 제발, 제발!

 

 

  “그리고…… 이치마츠 선생님께서도 같이 진행해 주셔야겠습니다. 지금 강사님들이 급하게 파견하러 다니시느라 인력이 부족해, 각 학교 양호선생님들까지 합동해 같이 교육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학교도 그러한 방식으로 해볼 예정이에요!”

 

  젠장.

 

  “……그럼 시일을 조금 미뤄서 진행하면 어떨까요, 교감 선생님. 초빙할 강사님들 인력이 넉넉할 때 말입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공문에 교육 시행 기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미루는 건 불가능해요. 이미 센터에 연락도 넣어놨고 말이지요. 어찌 됐건, 강사님들이 대부분 여자분이시더군요. 강사님은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고, 이치마츠 선생님께서 남학생들 교육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교구로 사용할 용품들은 센터에서 제공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어떠십니까?”

 

 

  그나마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피해 차라리 다행이다 싶긴 했다. 하지만. 좋게 말해 혈기왕성이지, 무릇 내게 ‘남자 고등학생’ 이라 함은 술, 담배, 음란한 것과 같은 사실상 세상 해악의 포자들만 품은 걸어 다니는 배양기나 다름없었다. 대놓고 말해 나는 그들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한두 명도 벅찬데, 그 떼거지의 머릿수라니 어떤 의미로 간에 장기가 타버려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최후의 발악을 했다.

 

 

  “그, 그렇게 성별을 나눠서 성교육을 진행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성 의식 함양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감 선생님. 성이란 것이 아이들에게 감추면 감출수록 더 호기심만 불러일으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나눌 것이 아니라, 함께 통합된 장소에서 개방되고 진솔한 이야기를 제대로 된 전문가와 함께하며…”

  “…이치마츠 선생님. 강사님 초빙은 지금이라도 무를 수 있습니다. 이치마츠 선생님이 대강당에서 한꺼번에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는 것도 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양호선생님이 들려주는 성 이야기, 얼마나 흥미롭겠습니까! 커다란 빔프로젝터를 사용해서 보기 쉽게! 강당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얼마 전 새로 교체한 스피커도 사용해보고 말이지요!”

 

 

  교감의 공격은 강력했다. 나는 권력 앞에 무릎 꿇어야 하는 어린 양이었으며 철저한 을이었다. 일언반구 내뱉을 말도 없이 멍청하게 벌어진 입을 수습하지도 못한 나는 관자놀이로 떨어지는 땀방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선택지는 하나였다.

 

 

 

 

 

  “진짜 웃겨! 아까 회의 때 교감이 그 사건 이야기하면서 핏줄 선거 봤어요? 손도 떨었다니까. 누가 교감 심리분석 좀 해줬으면 좋겠어. 그 왜 있잖아요, 나 문화제 준비할 때도-.”

  “토도마츠 선생님. 저 피곤합니다. 나가.”

  “성교육 하는 것 때문에 그래요? 에이, 이 기회에 애들이랑 좀 친해지고 그러는 거지. 나 학교 다닐 때는 양호선생님이랑 참 친했는데. 애들이 어색하다고 다쳐도 보건실에 안 가려고 하는 게 말이 돼요? 땡땡이치러 오는 애들도 하나 없죠? 무슨 재미냐, 이게.”

 

 

  토도마츠 선생은 회의가 끝나고 힘없이 돌아가는 나를 놀리며 보건실까지 따라왔었다. 게다가 한참을 그렇게 핸드폰을 만지며 저 혼자 주절대다가 배터리가 떨어졌다며 인사도 없이 나가버리고야 말았다. 여러모로 폭풍이 휘몰아친 느낌이었다.

  토도마츠의 부재로 사위가 조용해졌다. 의자 등받이에 한껏 몸을 파묻으며 안경을 올려 건조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하아.”

 

 

  그냥 다친 애들이 없는 줄 알았는데 어색하다고 오지 않았던 거였구나. 나는 우리 학교 학생들의 눈물 나는 배려심에 깊이 감사함을 느꼈다. 얼굴은 모르지만 이렇게도 내 마음을 잘 알아주다니. 너희들 꽤 좋은 녀석들이었구나. 좋아, 기분이니 적당히 아프면 찾아와도 좋다. 월급만 축내는 도둑놈이 되고 싶은 것이 내 작은 소망이긴 하지만, 한 번쯤은 돌봐주마. 그리고 땡땡이는… 소름 끼치는 연기력으로 아픈 척을 하며 땡땡이를 치러 왔어도 어떻게든 돌려보냈겠지. 조퇴 증을 끊어주던가.

게다가 뭐? 양호선생님과 친한 사이라니, 그런 게 있었냐고. 그런 게…….

 

 

  「-선생님, 오늘도 커피를 많이 마셨나. 보건실에 커피 냄새가 엄청 나는데. 오늘 밤 잠에 들지 못하겠군. 자장가가 필요해지는 건 아닌가?」

 

  커피를 마시든 말든. 자고로 어른은 찌르면 피 대신 커피가 나와야 정상이란 말이야. 그리고 내가 애냐, 잠을 못 자게.

 

  「선생님! 점점 더 내 슛 폼이 좋아지는 것 같은데. 한번 봐줄래?」

 

  슛 폼이 좋아지면 어쩌게, 너 골도 못 넣잖아.

 

  「선샤인이 찬란하다. 윈드는 따뜻하다. 내 바디가 더 이상은 콜드하지 않아.」

 

  같잖게 영어 쓰지 마. 못 들어 주겠다, 진짜.

 

  「선생님, 나는, 내가….」

 

  …네가, 뭘.

 

 

 

  “하.”

 

 

  짧은 탄식이 나왔다. 나는 불가항력처럼 이어지던 회상의 고리를 강제로 끊고 눈을 떴다. 강압적으로 밑바닥에 묻고 있던 기억에 참담함을 느꼈다. 이제 안 그래도 준비해야 할 일이 많은데, 네 앞에서 성을 논해야 하는데, 이렇게 허락도 없이 내 의식을 붙잡지 마. 바쁜 어른이자 머리까지 복잡한 쓰레기는 이렇게 네 탓을 할 수밖에 없어.

  잡념들을 떨치기 위해 개수대에서 간단히 세수했다. 찬물을 끼얹으니 뜨겁던 얼굴의 열기가 다소 가라앉았다. 창가 위에 올려둔 안경에는 어느 틈에 물방울이 튀었는지 반짝하고 빛이 났다. 제대로 닦지 않으면 얼룩이 질 것이다.

 

 

 

 

**

 

 

 

  어젯밤, 내가 무슨 노래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번뇌로 인해 잠이 좀처럼 오지 않으니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만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다, 어느샌가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면의 경계선은 언제나 모호하다. 내가 잠에 빠지는 그 순간을 제정신으로 목격하고 싶어도 좀처럼, 아니 어쩌면 영원히 성공하지 못할 시도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는 또 꿈을 꿨다.

  짧은 머리로 드러난 반듯한 얼굴, 짙은 눈썹, 단정한 콧날은 마치 가파른 절벽을 떠올리게도 했다. 반듯하게 펴진 어깨를 감싸는 검정 교복은 새하얀 셔츠와 대비를 이룬다. 내 파렴치한 손끝은 약간은 까슬한 섬유의 교복 상의를 거슬러 올라간다. 덜 여문 목젖을 배회한 뒤, 작은 턱을 따라 작은 귓불에 도달한다. 그 보드라움을 주무르다, 눈썹 끝에 입술을 댔다. 짙고 촘촘히 난 눈썹 사이에 스미는 습기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

 

 

  간만이었다. 외설적인 꿈은 꾸지 않으려 부단히도 노력했었는데 허사였나 보다. 의식과 무의식이 반영된 산물은 아침부터 나를 죄악감에 시달리게 했다. 잠은 이미 달아났다. 숨을 고르고 있자니 뒤이어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끌 생각도 하지 못하며 나는 드로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역시나.

  진득한 액체가 엉긴 속옷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오늘 성교육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학생들이 아니라 나는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평소보다 배는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급조된 연수를 한번 갔다 와야 했고, 성별 별로 분담하여 교육을 진행하는 탓에 센터에서 파견 나올 강사와도 짧은 사전 미팅을 했었다. 오소코라고 하는 강사는 말이 없는 나를 데리고도 무리 없이 미팅을 진행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여학생들이 이번 기회에 꽤 신선한 충격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진행 과정들을 전해 들으며 시청각 자료 중 동영상과 프린트물 같은 것은 메일로 먼저 받을 수 있었다. 이걸로 연습하며 단련을 하자 마음을 먹었었는데, 막상 당일이 되니까 그동안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나는 강사가 내미는 플라스틱 박스를 멍하니 바라만 보는 중이었다.

 

  “뭐해요. 받아요.”

  “이게, 이게.”

  “저번에 말씀드렸던 모형이에요. 라텍스 장갑들도 들어있고, 콘돔도 잔뜩 들어있으니까 학생들 여러 명 실습시켜도 무리 없을 거예요. 받아요. 팔 떨어질 것 같으니까.”

 

 

  박스로 가슴을 치듯 넘겨준 강사는 그럼 잘해보시라고 감흥 없이 말한 뒤,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갔다. 모형으로 콘돔을 씌우는 법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형이 이렇게, 대놓고!

 

 

  “헉. 이게 뭐야?”

 

  사실적일 줄이야.

  얼어붙은 내 뒤에서 또 언제 왔는지 내가 든 박스를 쳐다보던 토도마츠 선생은 진저리를 치며 스스로 껴안았다. ‘진짜 싫어! 더러워! 남의 거 쥐어 잡는 기분일 것 같아!’ 빽 소리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온종일 이 사실적인 모형을 주물러야 하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나는 있는 힘껏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토도마츠를 쳐다봤다.

 

 

  “저기, 톳티 선생님. 오늘 수업 많습니까?”

  “수업 많아요. 이렇게 보여도 문학인데. 도와줄 시간 같은 거 1분도 없는걸요. 열심히 해봐요, 이치마츠 선생님. 내가 응원해줄게. 사실 응원하려 들린 거였어요. 그럼 안녕, 파이팅.”

 

  그렇게 수업이 많다는 놈이 허구한 날 양호실에서 농땡이 친 거냐? 끝까지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나의 화를 돋운 토도마츠는 평소처럼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복도에서 들리는 그의 웃음소리 때문에 나는 제대로 현실을 실감했다. 그래. 쫄지 말자. 아이들이 그 어떤 소리를 지껄여도 당황하지 말자. 페이스에 휘말리지 말자. 나는 자신에게 주문을 되뇌며 마른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여학생들은 비교적 큰 대강당에서 진행하기로 했고, 나는 소강당을 배정받았다. 소강당이라고는 해도 수용인원이 많아, 각 학년 여러 반의 남학생들을 한꺼번에 앉힐 수 있었다. 1학년 두 번, 2학년 두 번, 3학년 두 번. 총 여섯 번. 나는 제법 긴 시간을 고통받아야 한다는 것에 처참한 마음이 들었지만, 호흡을 가다듬으며 소강당으로 가는 길 내내 정신을 무장했다.

 

  사전 설문지를 넘겨준 뒤 동영상 자료 시청. 대부분의 교육은 동영상에서 자세히 해준 덕분에 실상 나의 할 일은 엄청나게 많지는 않았다. 그놈의 남자 보건교사로서의 가르침에 대한 의무와 콘돔 실습이 중압감을 주는 것이었다.

  질풍노도의 1학년을 대상으로 두 번이나 교육을 진행하며, 나는 입으로 크게 내뱉지 않았다 뿐이지 끊임없이 비속어를 중얼거렸다. 뒤늦게 자각을 하니 고함을 친 것 같기도 하다.

  내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지자, 몇몇 까불대는 녀석들은 장난을 걸기도 했다. ‘우리 반 여자애들한테 선생님 은근 인기 많다고요.’, ‘선생님 인상만 안 쓰면 잘생겼을 것도 같슴다!’ 라니,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리를 하라고 진정시키는 것 역시 내 몫이었다. 미친 원숭이 같은 무리들을 매일같이 통제하는 교사들에게 존경심이 샘솟았다.

 

  1학년에 비해 2, 3학년은 좀 더 낫지 않을까. 나는 후에 깨질 비루한 착각을 하며 텀블러에 담아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2학년이 나을 리가 있냐고. 성질로 봐서도 아니고, 호르몬으로 봐서도 아니지만 내게 가장 큰 문제는 그 2학년에 지금 이 순간 가장 꺼리고 싶은 상대가 있다는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2학년의 앞반 남학생들이 모인 세 번째 수업이 끝나고 나는 드디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에 이르렀다. 한층 커진 덩치와 더불어 그들의 파괴적인 언행은 1학년을 비웃으며 그 위엄을 뽐냈다. 나는 1학년들 수업과는 비교가 불가능하게 고함을 쳐야 했고, 동영상을 수차례 멈춰야 했으며, 성기모형을 보고 경박하게 손을 흔들어 대는 학생들에게는 각자의 담임 선생님께 명단을 넘기겠노라 협박을 했다. 물론 그들의 이름과 학번은 모르지만.

  그리고 대망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나는 다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어떤 표정으로 그 애를 봐야 하지. 벌써 아이를 본지 꽤 오랜 날이 지났다.

  떨리는 손으로 무릎을 잡고, 상기된 얼굴로 보이지 않는 선을 넘으려 했던 아이다. 나는 겁이 났었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제 마음을 고하려 하는 아이의 입을 충동적으로 막았다. 작은 얼굴은 내 손에 의해 그렁그렁한 눈만 내놓은 채 자취를 감췄었다. 비겁하다고 생각했겠지. 일말의 양심과 가책이 중력에 힘을 싣는 느낌은 참으로 불쾌했다. 비겁한 어른은 그렇게 현실 도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책임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너는 아직 몰라. 어리고 따스한 입술이 축축하게 손바닥에 닿은 느낌은 얼마 안 가 떨어졌다. 언제 흘렸는지, 아이의 눈물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겨우 힘을 내 눈을 떴다. 텅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공허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감출 수 없는 참담한 마음에 뜨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말없이 바라보다, 나는 아직 남아있는 손등의 물기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울리려던 건 아니야. 울지 말았으면 좋겠다. 너는 웃는 게 제일…….

 

 

  “진짜 미치겠다.”

 

 

  아이를 본 마지막 순간을 회상했다. 그동안은 안간힘을 쓰며 떠올리려 하지 않았지만 이제 더는 피할 길도 없었다. 몇 분 후 종이 치기 전에 2학년 뒷반 아이들이 들어 올 것이다.

아이는 2학년의 끝 반이다. 좋든 싫든 그 얼굴을 마주해야한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나는 감히 그 얼굴을 상상해본다.

  이후에 더 울지는 않았을까. 원래부터가 눈물이 많은 편인데 눈가가 짓무르게 운 건 아니겠지. 내가 혐오스러워지진 않았을까. 그동안 보건실에 다시 오지 않은 걸 보면 가능성이 크다. 모든 것이 내가 감내해야 나의 업보다. 아이의 표정이 예전 같지 않고 싸늘하더라도, 상처받지 말자. 입이 마르며 간절하게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지만, 피곤함에 떨리는 눈가를 문지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하릴없이 창가에 서서 바깥만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드디어 학생들이 떼를 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음이 내려앉는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그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찾기 시작했다. 상냥한 탓에 친구가 많아 보였다. 분명 이곳도 친구 여럿과 오겠지. 몇 분이 흘렀을까, 종소리가 울렸다. 나는 아직 그 아이의 목소리를 찾지 못했다. 몸을 돌려 단상으로 걸어가는 와중의 시야에서도 아이를 찾았다.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가 없었다. 뭐지. 어디가 아픈가, 아니면 나를….

 

 

  “피하는 건가.”

 

 

  중얼거린 목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삽시간에 숨이 막혀오는 듯해 나는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침착하자. 어디가 아픈 것보단 피하는 게 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저마다 끼리끼리 모여 착석한 학생들의 입에선 쉴 새 없이 욕설과 음란한 단어가 나오고 있었다. 왼손으로는 동그란 모양의 고리를 만들고 오른손 검지로 그 손가락 고리를 드나들게 움직이며 걸쭉한 웃음소리를 내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간드러진 목소리로 우스꽝스럽게 신음을 내보이는 놈도 있었다. 최소한의 필터로의 여과 없이 제 수준들을 내 비추는 호르몬 덩어리들을 보며 기운이 빠진 나는 겨우 힘을 내 말 했다.

 

 

  “…어, 뭐. 제가 하게 됐습니다. 칙칙한 남자 양호선생님이 해주는 성교육이라 저도 유감입니다. 앞반 친구들도 다 듣고 갔으니 억울해하지는 마십시오. 사실, 여러분들의 올바른 성 의식은 제가 돕는다고 올바르게 크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집중해서 듣기 바랍니다. 거기 앞에 앉은 사람들, 이리 나와서 설문지 가져가요.”

 

 

  차라리 그 애가 없는 것이 더 낫겠지. 나는 헛기침을 하며 눈대중으로 설문지를 나누기 시작했다. 둘, 넷, 여섯…. 까만 머리꼭지들을 세고 있는데, 별안간 문이 조용히 열렸다. 시선이 향한 곳엔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게 하는 아이가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 알겠는 건, 아이가 아픈 것이 아니라서 안도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시선을 내리고 다시 머릿수를 센다. 뒷자리에 앉은 아이를 포함해서. 하지만 잔상처럼 남은 시무룩해 보이는 얼굴에 조금 가슴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설문지가 모든 학생의 손에 들어가자, 본격적으로 동영상 구동을 위해 연결된 노트북을 만졌다. 대강당의 스피커를 교체할 돈은 있고 소강당 노트북 하나 교체할 예산은 없는지, 노트북은 많이 노후하여 느렸다. 학생들은 시끄럽게 저마다의 헛소리를 하며 설문지에 대한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이것저것 준비하며, 나는 다시 힐끔 아이를 쳐다봤다. 고개를 숙여 설문지를 읽고 있는 탓에 눈이 마주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설문지는 익명이긴 하지만, 나중에 개수를 셀 거니까 구기거나 버리지 않도록. 이제부터 동영상 하나를 틀어 줄 건데, 조용히 시청하시기 바랍니다. 최대한 교양 있는 정상인처럼 정숙하게. 여러분들이 느끼는 바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저요, 선생님! 먼저 들은 애들이 동영상 재미없다던데 그냥 선생님 이야기해주시면 안 돼요?”

  “내 이야기라니 무슨 소리-.”

  “와아! 선생님 첫 키스요!”

 

 

  아니 귀마개를 한 건가? 정말이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건가? 정숙해달라는 나의 간절한 요청은 쓰레기통에 처박은 거냐? 기어코 미친 짓을 시작하는 천둥벌거숭이들을 보며 나는 꽤 당황했다. 본격적으로 함성을 지르는 혈기들을 바라보며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내내 정수리만 보여주던 아이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끄럽다. 닥치라고 욕을 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시작하려던 동영상을 다시 멈춘 뒤 목을 가다듬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특별히 여러분들만 담임 선생님들께 추후 감상문과 별도의 과제를 받아 달라고 할 겁니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조용히 봐. 알았습니까?”

  “…….”

 

 

  사위는 정적에 휩싸였다. 과제를 추가 제출하라는 것이 꽤 잘 통한 듯했다. 예민하게 좁아졌던 눈가를 문질러 힘을 풀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이미 사전의 예습과 세 번의 수업 때문에 여러 번 본 탓에 이제는 동영상 속 내레이션을 줄줄 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단상 옆에 비치된 의자에 앉으며 나는 다시 텀블러를 들었다. 손에 잡히는 원형의 몸체엔 온기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싸늘해진 커피를 마시며 아닌 척해도 불퉁하지만 흥미롭게 동영상을 바라보는 학생들을 지켜보았다. 이러나저러나 아직은 어린 학생들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지나며 봐온 성교육용 동영상보다야 조금은 더 사실적이게 구성된 내용이었다.

  동화 같은 그림체의 남녀가 손을 잡고 누워 있으면 남자의 성기에서 정자의 이미지가 나와 여성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3D의 인체들이 실제 삽입을 하는 장면이라던가, 뼈와 장기가 움직이는 여성의 임신과정 끝에 실제 출산 장면까지 담은 동영상이었다. 3D 삽입장면이라니, 그래 봤자 이곳에 있는 100%의 학생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핸드폰이나 컴퓨터로 많은 에로비디오를 봤었겠지만.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아이, 몰래 책상 밑으로 손을 넣어 핸드폰을 만지는 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낄낄대는 아이들까지 모두 그전 수업시간에 다 겪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

 

 

  어떻게든 안간힘을 쓰며 내 눈을 피하려고 하는 아이가 있다는 점이려나. 나는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 번쯤은 쳐다봐주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기대가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치밀었다. 너도 자기 전에 핸드폰을 손에 쥐고 살색이 난무하는 동영상을 보곤 할까? 손을 아래로 향해 바지 속에 은밀히 집어넣을까. 왠지 모르게 청결할 것 같은 너의….

 

 

  “젠장.”

 

 

  미친놈. 나는 미친놈이 분명했다.

  학습력이라고는 나이를 먹으며 다 토해낸 건지, 아침에 젖은 속옷을 보고도, 문을 열고 침울해 보이는 표정으로 들어오는 너를 보고도 나는 이러고 싶을까. 한심함에 중얼거렸는데, 그 순간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들은 건가. 동영상의 소리에 묻힐 정도였는데. 꽤 먼 거리였지만, 당황한 얼굴, 눈동자마저 떨려 보였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마침 동영상이 끝이 났다. 먼저 시선을 거둔 것은 아이였다. 까맣게 변한 화면에 눈을 두곤 입술을 꾹 닫는다. 이거, 꽤 좋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뒷머리를 긁적이고 나는 다시 단상으로 돌아갔다.

 

 

  “여러분들이 많은 교훈을 얻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짧게 말해, 핵심은 역시 건강한 연인관계에서의 성관계를 지향하고 철저히 준비될 때 까지는 가급적 피임을 해 임신을 하지 않는 것이겠죠.”

  “네-. 알겠냐, 멍청아? 너 결혼할 때까지 섹스하지 말라고.”

  “…거기. 시끄럽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애먼 여자에게 상처 주지 마세요. 한 생명을 포함해 그 생명을 잉태할 여성 또한 제대로 부양할 수 있을 때까지 콘돔을 사용한 피임은 필수입니다.”

  “노 콘돔 노 섹스!”

  “맞는 말입니다. 게다가 콘돔은 비단 피임뿐 아니라 성병 예방에도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지금부터는 어떻게 하면 제대로 콘돔을 착용하는가 직접 배우고 실습을 할 겁니다. 모든 학생이 하는 건 아니고, 일단 모형으로 시범을 보일 테니, 절대 소란스럽게 굴지 말도록. 튀는 행동을 하는 학생은 진짜로 교무실에 데리고 갈 거니까.”

 

 

  ‘콘돔’이라는 단어가 주는 마법은 대단했다. 내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강당 내 대부분의 아이가 활기를 되찾았으니까. 발정기가 막 온 어린 짐승 새끼들을 보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한번 노려본 나는,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성기 모형과 콘돔 박스를 꺼냈다. 라텍스 장갑까지 꼼꼼하게 끼고, 지극히 무미건조한 어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콘돔의 포장을 뜯고, 끝을 살짝 비틀어 공기를 빼 천천히 성기 모형에 씌웠다. 한시가 급한 실제상황도 아니었고, 교육을 위해 부가적으로 늘어놓은 설명까지 포함해도 단 몇 분도 소요되지 않았지만, 역시 이 찰나의 순간은 모든 수업을 통틀어 가장 조용한 시간이었다.

 

 

  “끝입니다. 아무튼, 조금 전에 설명했듯이 제대로 된 삽입 전에 콘돔을 씌우는 것만큼, 공기를 빼는 것은 꽤 중요합니다. 정액이 들어갈 공간을 제대로 만들어 주고, 콘돔이 찢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거죠. 사정 후에는 상대방의 몸속에 오래 있지 말고 성기를 빼내 콘돔을 잘 묶어 버리면 됩니다. 잘 알아들었으면 이제 한 명 나와서 실습해 볼까요. 누구 해보고 싶은 사람 있습니까?”

  멀쩡한 척 학생들에게 지원자를 모집하는 순간에도 나는 참을 수 없이 머릿속이 끓고 있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저 시범일 뿐이니까, 실습용 모조 성기에 콘돔을 씌웠을 뿐이니까. 절대로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니까. 나는 그렇게 자위를 하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이를 꽉 물었다. 여태까지의 수업에서 지루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진행했던 일련의 행동들은 청중 속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 내게 큰 격동을 주었다.

  일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나의 노력과는 다르게 학생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네가 해, 내가 해볼까, 나는 많이 해봐서…. 이럴 때 보면 정말 유치하고 어렸다.

  나는 어색한 느낌에 라텍스 장갑을 벗은 손으로 열이 오른 귀를 만지고 있었는데, 순간 내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앞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신경이 쏠렸다.

 

 

  “마츠노 시키자.”

  “마츠노를? 장난하냐?…… 저는 그 장난 찬성이요.”

 

 

  저들끼리 작게 이야기하는 정도였지만 대화 속의 이름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그것이 아니었다.

  마츠노 라니. 학교에 재직 중인 모든 교직원 중에선 가장 학생들의 정보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자부하는 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마츠노’가 딱 한 명 있었다.

 

 

  “선생님! 마츠노를 추천합니다!”

  “동의합니다!”

 

 

  봐, 친구가 많다 했잖아. 장난이라도 대부분의 학생이 한마음 한뜻으로 외치는 이름은 겨우 진정하려던 내 마음을 다시 일깨웠다. 이름의 주인공은 크게 당황했는지 서서히 얼굴이 붉어진다. 손사래를 치며 몸을 들썩인다. 못내 귀여운 모습에 그동안의 긴장은 어디 갔는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였다.

 

 

  “아, 아니다 선생님! 너희들, 이런 장난은 재미있지 않다!’

 

 

  그리고, 그동안의 시간이 무색하듯 아이는 내게 눈을 맞춰왔다. 이제야 겨우.

  도와달라는 건가. 흔드는 손에는 내가 붙여주지 않은 못 보던 밴드가 있다. 우리 사이의 간극이었다.

 

  그동안 왜 안 왔어, 아픈 곳이 많지는 않았고? 분명 칠칠찮아서 운동하다 많이 다쳤을 텐데. 슛 폼이 좋아졌다며 골은 하나라도 넣었는지 모르겠네. 내가 저번에 말한 그 고양이, 수술하고 왔는지 귀 끝이 잘려서 돌아왔어. 다행이지? 너도 궁금해했잖아. 이 넥타이는 저번에 내가 인터넷 쇼핑할 때 네가 골라준 거야. 눈치는 챘는지 모르겠네. 별로 안 어울리는 것 같아 보여도 내내 하고 다녔다고.

 

  …저기 있잖아, 정말 내가 싫어진 거냐? 묻고 싶은 것이 많은데, 대답해 주면 안 될까.

  응? 카라마츠.

 

  내 번뇌의 주인이자, 어젯밤 꿈의 주인공. 빌어먹게도 사랑스러운 너.

 

 

  잠깐이었지만 여전히 시끄러운 학생들과 진땀을 빼고 있는 카라마츠를 보며 나는 감회가 새로워졌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하루, 그 시작을 알리는 출근길에서의 하늘을 보며 나는 너를 떠올렸고, 점심을 먹고 교사를 지나가는 길에서 작열하는 한낮의 태양을 보면서도 그마저도 너보단 못하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청량함 그 자체인 마츠노 카라마츠.

  가까이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어졌다.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나와.”

  “…으응? 서, 선생님, 나는 하겠다고 한 적-.”

  “나와, 마츠노. 괜찮으니까.”

 

 

  아이 한정으로 너무 다정하게 군 것 같아서 조금 뜨끔하긴 했지만, 나는 이내 털어버리고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카라마츠를 맞이했다. 이렇게 가까이 서 있는 건 오랜만이었다. 머리가 멈춰버릴까 하는 염려로 나는 더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꿈에서마저 선명하게 그려지는 뒷덜미를 남몰래 흘긋 쳐다보고 라텍스 장갑의 포장을 뜯어 아이에게 건넸다. 학생들은 여전히 키득거리는 중이었다.

 

 

  “장갑 끼고. 방금 설명 잘 들었지.”

  “…이치마츠 선생님.”

  “그래. 나 이치마츠 선생님 맞으니까 장갑 끼자.”

 

 

  아이의 팔꿈치를 감쌌다. 아이는 잠시 말없이 나를 쳐다보다가, 한 손씩 건네준 장갑을 끼웠다. 조심스러운 모양새였다. 나는 콘돔 하나를 꺼냈다. 아이가 실습하기 편하도록 성기 모형과 함께 그의 앞에 두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천천히 해.”

 

 

  아이가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너도 편하진 않겠지. 그렇게 자리를 떠난 뒤로 다시 만나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성교육에, 콘돔 착용 실습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조금 어이없는 해후였다. 나는 팔짱을 끼고 카라마츠가 움직이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주위의 모든 상황이 소거되는 기분을 느꼈다.

 

  아이는 조심히 콘돔을 뜯는다. 전에 만져본 경험이 있을까?

  당장은 어색해 보이는 행동에 나는 작은 안심을 했다. 라텍스 장갑을 끼고 있어 다행이다. 나는 아이의 맨손에 콘돔의 윤활제가 묻어나는 것을 아직은 볼 자신이 없었다. 설명을 잘 들었는지, 가르쳐 준 대로 콘돔의 끝을 누른 후 성기 모형의 선단에 가져다 댔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이 실리콘 재질의 그것을 붙잡는다.

 

  나는 등허리 어디쯤에서 피어나는 눅눅한 열기를 모른 척하고 있었다. 추하고 불온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도대체 어디까지 떨어질 건데? 나는 스스로에 대한 부질없는 검열에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다. 가당치 않은 나의 음욕을 부추기는 존재가.

  아이는 성기의 기둥을 따라 콘돔을 조심히 내린다. 아래가 조금씩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는 와중에, 이번엔 내 쪽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 나는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러운 카라마츠를 향해 왁자지껄하게 웃어대는 학생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나는 아직 기둥을 잡고 있는 아이의 손을 조심히 감싸 풀었다. 그리고 울렁거리는 속과 제재 없이 떠오른 위험한 상상을 내리누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했어. 그렇게 하는 거야. 장갑 벗어도 돼.”

  “…응.”

 

 

  카라마츠의 얼굴이 곧 터질 듯 붉었다. 내 얼굴도 마찬가지는 아닐까 걱정을 하며 살짝 웃자, 아이의 어깨가 눈에 보이게 흠칫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괜히 애틋해 지는 감정에 아이를 얼른 들여보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더 있으면 입고 있는 가운으로도 바지 앞섶을 가리기 힘들어질 것 같아서.

 

  “보시다시피 간단합니다. 누가 하든 이렇게 똑같이 하면 돼요. 자 이제-.”

  “야, 마츠노! 네 걸로 한 번 더 해봐! 보여줘! 보여줘!”

 

 

  학생들의 장난은 끝이 없었다. 순식간에 시끄러워지는 장내는 이미 몇 번이고 본 풍경이었다. 당황스럽고 불편하게 웃는 아이도.

  다만, 이번엔 진심으로 내가 화가 났다는 점이 전과 달랐다. 머리에 찬물을 들이부은 듯 열기가 가셨다.

 

  “…방금 말한 사람, 일어나.”

  “네?”

  “뚫려있다고 막 지껄이면 안 되지. 짐승보다 못한 소리를 했다는 자각은 있었으면 좋겠군. 성교육 시간에 대놓고 하는 성희롱이라니, 시간을 쏟고 있는 나를 쓰레기 취급하는 것 같잖아. 맞나?”

  “아, 아닙니다. 죄송….”

  “죄송해야할 건 내가 아니라 마츠노겠지. 넌 끝나고 남아. 마츠노, 너는 들어가도 좋아.”

 

 

  감히 누구 앞에서 누구를 향해 망발하는 건지.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까칠한 반응이 나왔지만, 그보다 더 화가 난 것은, 저런 머저리들이 평소에도 아이를 향해 이런 장난을 치곤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괜한 기우였으면 했다. 예민해진 나를 해석할 수 없는 얼굴로 쳐다보던 카라마츠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굳어진 분위기를 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니 풀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조금 더 맞는 말일 것이다. 뒤이어 남은 과정을 진행하고 마지막으로 사전 설문지까지 수거하고 나니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점심시간이 시작된 것이기도 했지만, 숨 막히는 공간에서 나간다는 행위가 학생들의 숨을 트이게 했는지 소강당이 텅 비게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성희롱을 한 녀석은 떨떠름하고 언짢은 표정으로 강당을 벗어나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같이 가자는 친구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카라마츠도 남으려는 듯 제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기만 했다.

 

 

  “거기 너는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이곳에다 학번이랑 이름 적고 가. 개별적인 면담은 후에 따로 부를 테니 일단은 점심부터 먹어라.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으니 착각하지 말고. …마츠노, 너한테는 남으라 한 적 없는데.”

 

 

  한시도 더 있기 싫다는 듯, 찡그린 얼굴로 재빨리 학번과 이름을 휘갈기고 떠난 제 친구를 보고서도 카라마츠는 아무 미동도 없었다. 나는 고요해진 주위와 그 고요함에 한 몫 보태는 아이 때문에 조금 난처해졌다. 둘이 함께 있는 공간은 넓지만 좁았다. 나는 별안간 발가벗고 있는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담배, 담배가 필요하다. 무뚝뚝하게 내뱉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아랫입술을 깨 물으며, 나는 흡연욕구와 함께 어른으로서는 가지기 힘든 수줍음을 참고 있었다.

 

 

  “…고마워, 선생님.”

  “어, 그래……. 응?”

  “…화내준 거. 사실 프렌드가 조금 짓궂어서 곤란했다.”

  “그거야 성교육 해주는 보건교사로서…. 아니, 너 평소에도 그런 장난 당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래? 막 시도 때도 없이 너에게 저질 농담 지껄이고 그러는 거냐? 아까 그놈들이야? 아니면 더….”

  “다행이야. 이제 선생님이 나를… 싫어할 줄 알았어.”

 

 

  평소와 다르게 자신감 없는 말투다. 언제나 숨소리 하나마저 반짝이는 너인데.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어떻게 싫어해.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선택지는 없다고.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언감생심이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두고 걱정한 아이의 여린 마음에 울컥했다. 그래서 발길을 끊었구나. 내가 널 싫어하는 줄 알고, 내가 널 거부한 줄 알고.

  제 발끝만 쳐다보느라 나를 향한 정수리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그 기분 좋은 감촉을 느끼며 나는 나지막이 되뇌었다.

 

 

  싫어하지 않아, 나는 널 싫어하지 않아, 나는 널…….

 

 

 

 

 

**

 

 

 

  별로 입맛은 없었지만, 여학생들의 성교육을 담당한 강사를 책임지는 것이 내 몫이었기에 나는 뒤늦게 찾아온 그녀와 점심을 함께해야 했다.

 

  ‘그러니까, 왜 교감 선생님이 여학생들 성교육에 참관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니까요. 땀은 어찌나 흘려대는지. 당신 업무나 보라고 조용히 타일러 보냈답니다. 애도 아니고, 참나. 그런데 재미있는 학생들이 몇 있더라고요. 쥬시코였나? 내가 이름도 물어봤다니까. 질문만 했다 하면 우렁차게 대답을 하는데 얼마나 웃기던지! 나중엔 슬쩍 걔가 쓰는 속눈썹 제품도 물어봤어요! 하하!’

 

  교감의 작태에 치를 떨다가도 호탕하게 웃어대며 전투적으로 점심을 해치우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느리게 젓가락질을 했었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관심도 없이 멍하니 있으려니, 먼저 식사를 끝낸 그녀가 살짝 웃으며 브이 모양을 한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그녀와 함께 흡연자 교직원들이 몰래 애용하는 구관 교사 옥상에 오른 게 조금 전의 일이었다.

 

 

  “하-.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응? 꽤 담백한 거 피우시네요.”

  “…….”

 

 

  사실 내 머릿속은 조금 전의 기억이 부유하며 조금의 틈도 내주지 않고 있었다.

  열심히 널 싫어하지 않는다고 되뇌던 나의 입이 멈춘 후에도 카라마츠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불현듯 치미는 당황스러움에 네 부 활동을 위해서는 점심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고, 이제 점심을 먹으러 가라고 카라마츠에게 말했었다. 꼭꼭 씹어서 먹어, 알겠어? 하지 않아도 될 잔소리까지 마치고 나니, 카라마츠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선생님.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야. 이제 몇백 밤만 자고 나면 성인이라고.’

 

  귀여워. 귀여움이 너무 과해 미치겠다. 대체 뭐야 그게?

  그러니까… 애초에 몇백 밤을 자고 난다는 말을 쓴 시점에서 네 또래 고등학생들이랑 너무 다른 거라고, 네가.

  나는 그 차별화된 순수함에 혀를 차며 마저 연기를 내뱉었다. 폐부 깊숙한 바닥을 치고 흩어지는 독성의 연기가 조금쯤은 정신을 차리는 것에 도움을 주었다.

 

 

  “어머, 이젠 바보같이 웃네. 저기요. 침 떨어질 것 같아요.”

  “…예, 예?”

  “무슨 생각을 하면 그렇게 멍청하게 웃을 수 있어요? 나도 좀 압시다. 하늘에 뭐 재미있는 거 있어요?”

  “죄송합니다. 조금 다른 생각을 하느라……. 아. 저기, 오소코 씨. 아까 수업에서 성희롱 같은 장난을 친 녀석이 있는데.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늘을 쳐다보던 고개를 돌리면서 코로 연기를 훅 내뿜으며, 오소코는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성교육 중에 성희롱을요? 선생님한테요? 그런 빌어먹은 놈이 있나요? 이래서 요즘 애들이란!”

  “물론 저는 아니고, 실습을 한 학생한테요. 그 아이가 아주 착하고 귀엽고… 아니, 아무튼 말입니다. 그 아이가 순진하고 착하다 보니까, 평소에도 그런 장난을 당할까 봐 걱정도 되고. 크게 벌을 줘야 이후로 덜 할 것 같고. 본보기를 어떻게 삼아야 할지 고민입니다.”

  “음. 벌보다는 반성문이랑 숙제가 필요하겠네요. 아, 그쪽 교감 선생님한테 맡겨보는 건 어때요? 아주 피를 말려줄 것 같은데. 하하!”

 

 

  무서운 여자다. 교감을 본 건 몇 분도 안 될 텐데, 어쩌면 그렇게 그를 잘 파악했을까. 나는 괘씸했던 놈과 교감이 있을 상담실이 생생히 그려지는 듯해, 그 소름 끼치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단연 최고의 벌이다. 상담 한 번만으로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연쇄적으로 이어질 참교육의 굴레에 갇힐 놈이 약간은, 아주 약간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놈은 허튼소리를 다시는 하지 못할 것이다.

 

  3학년 수업을 위해 구관 교사를 빠져나가며 나는 전과 비교해 크게 후련해진 마음에 긴장이 풀렸다. 피로는 쌓였지만, 한편으로는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만약, 오늘의 성교육이 없었고 아이와 강제적으로 만날 일이 없었다면 언제까지고 그 머리카락 한 올 구경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 결국은 내가 참지 못하고 방과 후의 체육관까지 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대담한 행동이라니, 10년 치의 용기는 필요한 일이다.

  어리석은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다.

 

 

  “흠. 그쪽, 피도 눈물도 없게 생겨선 은근히 학생도 챙기고, 꽤 다정한데? 소개팅 생각 없어요? 내가 자매가 많은데, 이상하게 우리 둘째가 꼭 당신 같은 타입에 빠지더라고. 생각 있으면 연결해줄게요. 몸매도 잘빠진 앤데, 어때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일단은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네? 어, 어라….”

 

  그런 표정 진짜 반칙이거든요! 하고 분개하는 그녀를 흘긋 보다가, 나는 주책없게 찢어지는 입 꼬리를 가리기 위해 손을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양심도 없다. 죽어라, 진짜.

 

 

  이후, 별 탈 없이 3학년 수업까지 끝내고 마무리 정리를 하면서도 오소코는 내게 그녀의 동생을 대며 다시 생각하기를 권유했다. 단호하게 거절은 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미련을 남기더니, 결국엔 태세를 전환해 내게 주변 친구들은 없냐고 묻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보챔도, 내가 친구가 있어 보이냐는 물음에 조용히 사그라졌지만.

 

  성교육에서 일어난 사건을 말하러 가는 길, 나는 해당 학생의 학번과 이름이 적힌 종이 외에 교직 공무원 대상 상담단체의 인터넷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를 더 들고 비장하게 교감을 찾았다. 이건 뭐냐고 묻거든 혹시 상담을 포함해 업무가 버거우시면 한번 들어가 보십사 하고 그를 잘 타일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사건을 조금 더 과장해서 설명한 다음 교감 선생님께서 노련하고 능숙하게 학생을 바른길로 인도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교감은 목덜미를 잡고 콧김을 내뿜느라 내 이야기는 잘 듣지 못했고 비로소 나는 카라마츠에게 성희롱을 한 그놈이 정말이지 큰 대가를 치르겠구나 하고 흡족했다.

  물론 상담단체 주소가 적힌 종이를 내밀며 앞서 생각한 것을 덧붙이니, 교감의 얼굴이 또 붉어지며 미소 짓기에 이 인간은 정말 답이 없다는 것도 느꼈지만. 진짜 연구대상감이다.

 

 

 

 

 

**

 

 

 

  시험이 머지않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보건실을 찾는 학생도 많이 줄었다. 더불어 문제 출제를 위해 교무실에 감금당해 있다 싶은 토도마츠까지 조용한 덕에, 나는 오래간만에 있는 힘껏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사실 말이 좋아 여유지, 늘어지게 게으름을 피웠다.

 

 

  “…….”

 

 

  창가에 서서 멍하니 커피를 마시다가 내린 시선 끝에는, 하얀 가운에 아직 옅게 보이는 얼룩이 있었다.

이 또한 아이와의 일이었다. 내가 항상 마시는 커피 맛이 궁금하다며 내 손에서 컵을 빼앗아 보려 하기에 위험하다 저지하려 했지만, 까치발을 들며 손을 뻗어댔었다. 막힘없이 부딪히는 따뜻한 몸에 아차 하는 사이 흘린 흔적이다.

 

  ‘나에게 커피 한 입 주기가 싫은 건가? 선생님 치사하다!’

 

  툴툴대는 아이에게 ‘내 컵에 네 입술이 닿으면 내가 무슨 상상을 할 줄 알고?’라며 변명을 할 수도 없기에 그냥 치사한 인간으로 남는 것을 택했다.

물론 그 일이 생긴 후, 사비를 들여 아이가 마실만 한 다과를 별도로 구매하긴 했었다. 카라마츠의 말대로 치사한 인간은 맞았는지, 아이가 아닌 다른 학생이나 토도마츠가 다과를 축내면 도끼눈으로 쳐다보게 됐지만.

  가운은 세탁을 맡기기 귀찮아 혼자 빨았더니 얼룩이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오랜 자취경력으로 빨래 정도야 눈 감고도 했지만, 손이 더 가는 일은 나도 모르게 미루고 만다.

 

 

  만약, 아이와 살게 된다면 어떨까.

 

  언제 한번 제가 만들었다며 가져온 카라아게의 맛은 꽤 훌륭했다. 어딘가 부족한 행동거지와 다르게 집안일은 야무지게 해내는 편인가. 나도 주먹밥 정도는 잘 만들 수 있는데. 그 외엔 도통 맛이 별로니, 아이가 요리하고 내가 청소랑 빨래를 맡으면 괜찮을 것 같다.

  햇빛이 좋은 날엔 같이 산책이나 드라이브를 가고…….

 

 

  “아서라, 미친놈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려던 기분 좋은 망상을 강제로 마무리 지었다. 이 정도면 중증이다. 한심함에 고개를 젓다가, 일이나 하자며 그나마 제출이 임박한 서류를 처리하고 있을 때였다. 타닥타닥, 조용히 타자치는 소리만 울리던 보건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나이스한 오후다, 선생님!”

 

 

  거창한 말이 오갔었던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관계가 개선됐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응어리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하고 딱히 켕기는 것도 없어졌겠다, 이제 거침없다 이건가. 이러한 점에서도 나는 아이의 밝고 순수한 저돌적임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섭도록 변함없이, 전과 같은 텐션으로 문을 열어 재낀 카라마츠에게서 찾은 평소와 다른 점은 걸음걸이였다.

 

 

  “문은 조심히… 마츠노. 걷는 모양새가 왜 그래. 또 다쳤어?”

  “역시, 선생님 눈은 예리하다! 들어봐, 내가 아까 판타스틱한 리바운드를 할 때였다…”

  “됐으니까 이리 와서 앉아봐. 천천히.”

 

 

  나는 잡고 있던 노트북을 접고 아이를 살피려고 했다. 하지만 어쩐지 내가 아이의 부상을 알아 채준 다음부터 묘하게 걸음걸이가 더 뒤틀리는 것 같아, 안경을 고쳐 쓴 뒤 본격적으로 아이가 앉은 의자를 당겼다. 혼자서 리폼 했다던 유니폼은 과하게 화려해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이런 옷 입고 경기나 할 수 있는 건가, 내가 주심이었다면 경기 시작부터 퇴장시킬 것 같은데….

 

  보호구를 차지 않은 왼 다리를 들어서 내 허벅지에 올렸다. 바지의 품이 넓어서 원치 않게 보이는 속살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힘을 주며 천천히 양말을 내렸다. 복사뼈가 불거져 건강하게 마른 다리를 거칠한 손으로 만지기 시작하는데, 나는 여지없이 자학에 빠지기 시작했다. 담배 피우고 손은 닦았지만, 토도마츠가 두고 간 핸드크림이라도 좀 바를 걸, 혹시 거칠한 느낌이 거북하진 않겠지…. 멍하니 다른 생각에 빠지다 본분을 잊은 듯해,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흘긋 쳐다보자, 정작 다른 생각에 빠진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무슨 생각해.”

  “그, 아무 생각도 없었다. 시, 시험공부 플랜을 좀…….”

 

  말은 왜 더듬어. 아이가 공부에는 영 관심이 없고 소질도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얼어 죽을 시험공부 생각이 아닌 뜬구름 잡는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아이가 학교에 입학한 후 몇 차례의 시험이 지나는 동안 보충학습을 받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대로 졸업 후 대학도 가지 않은 채, 백수로 쾨쾨한 나날들을 보내는 건 아니겠지? 그때가 되면 연결고리라고는 이 고등학교뿐인 우리 사이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될 텐데.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는 건가?

 

 

  “…공부 봐줄까.”

  “으응? 진짜? 선생님이? 나를?”

  “묘하게 무시하는 거로 들리는데…. 말 안 했나, 나 의대에서 전향한 거라고. 네 생각만큼 멍청하지는 않을걸.”

  “하, 완전 언빌리버블이다 선생님! 단 한 번도 말한 적, 아니! 나는 선생님을 멍청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선생님은 똑똑하고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걸!”

 

 

  맙소사, 타인에게서 다정하다는 말을 들은 건 성교육 강사 이후로 인생에서 두 번째였다. 물론 그 다정하다는 행위의 대상은 같은 사람이었지만, 당장 그 대상으로부터 다정하다, 그것도 ‘세상에서 제일 다정하다’라는 직언을 들으니 살짝 민망해졌다. 나는 멍청하니 주무르고 있던 발목에 무심코 힘을 주고 말았다. 실수였다. 많이 아프려나?

 

 

  “그럼, 앞으로 매일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보건실에 와도 되겠나? 이치마츠 선생님이 내게 공부를 가르쳐준다고 했으니까! 하항, 선생님이야말로 놀라지 마. 나는 한다면 하는 퍼펙트한 남자다. 아, 농구부 활동도 잠시 줄여야겠군. 선생님 들어줘. 내가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내가 이대로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나 또한 선생님이……”

  “…….”

 

 

 

  너 말이야, 좋은 대학도 좋다 이거야. 선생님이 되는 것도 네가 마음만 먹으면 나는 언제까지고 도와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손에 땀이 맺히고 얼굴에 피가 쏠렸다. 꼴이 우스울 것이다. 무엇을 어디까지 생각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흥분한 채 계속해서 떠드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나는 그동안의 비밀스러운 밤들이 떠올랐다.

  마음에 품은 존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허락도 없이 비집고 들어와서 제 몸집만 부풀리는 이기적인 감정이었다. 감정에서 돋아난 첨예한 가시가 속을 가르고, 상흔이 아물 새도 없이 추락하고 추락하며 기어코 만신창이로 된 내면이었다.

 

  꿈과 상상이 음습하고 외설적인 영역에 도달하자 자학은 거세졌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이성마저 좀먹어 가는 기분에 잘 하지도 못하는 술로 지새운 날도 많았다. 혼자 마시는 술은 달고 썼다. 아무리 달고 쓴 것이 인생의 맛이라지만 점차 쓰기만 해지는 그 맛에, 나는 시게 올라오는 울컥함도 삼킬 수 없었다.

 

  나는 어쩌면 너에 대한 저급한 열망이 거세당하는 것을 애써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했던가. 맞는 말이다. 네가 없는 곳은 결코 내게 평안과 안식이 깃든 비옥한 땅이 아닐 테니까.

  그리고 그게 아니라면… 나는 홀로 도망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이렇게 만나지 않은 현실의 이면으로 따뜻한 네 손을 잡고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모두 네 책임이다.

  그리고 어쩌면 추악하기만 할 내 미래를 바꿀 것도 너야.

  그렇다면 도와줘. 내 낙하속도를 줄여줘.

 

 

 

  “아, 내가 조금 투머치 했나. 선생님, 듣고 있어? 설마 고양이라도 생각하고 있나?”

  “꾀병을…”

  “으응? 무, 무슨 소리….”

  “꾀병을 부리면서까지 오지 않아도 돼.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

  “……. 미안해. 나는 그냥-.”

 

 

  급속도로 시무룩해지는 얼굴이 가련했다. 여태까지 아픈 척을 하던 멀쩡한 발목을 돌리며 움츠린다.

 

  아, 말주변이 없는 탓에 다시 오해를 사게 생겼다. 그리고 그건 전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이 정도론 어림없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

  어수룩하고 단순한 너도 제대로 눈치채줬으면 한다고.

 

  “…그게 아니라. 말을 잘 못 해서 미안해.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보고 싶다면. 만약 네 뜻이 그렇다면. 그때마다 날 보러 와도 돼. 내가 먼저 널 찾아가긴 힘드니까. 네 옆에만 있고 싶지만 그게 안 되니까. 나는 너만큼 용감하지 못하단 말이다. 부탁이니까 저번처럼 숨지마. 미칠 것 같아.”

 

 

  동그랗게 커지는 눈이 당황을 담는다.

  계속해서 올라와 있던 아이의 다리를 내리고, 땀이 흥건한 손을 무릎에 문질러 닦았다. 도통 나와 어울리지 않게 벅찬 이 상황이 두렵지만,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너도 이해할 거로 생각해서,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말 안 해서 미안해. 나 같은 놈 옆에 너같이 빛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마냥 도망치지는 않을게. 그럼 되잖아.”

 

 

  이제는 물기가 어린다. 코가 발긋해진 채, 울망한 눈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다.

  둑이 터졌다. 범람하는 감정에 제어를 잃은 입이 벌어진다. 다 토해내고 싶다.

 

 

  “적어도… 적어도 나 혼자만은 아니잖아. 너도 그렇잖아. 내 착각이 아니잖아…….”

 

  아이의 부드러운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는 건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 가슴이 미어진다고 해야 하나. 저번엔 옹졸하고 못난 마음에 바보같이 이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처럼 눈을 감긴 싫었다. 피하긴 싫었다. 이미 뱉었으니,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일단은 울지 마. 응? 카라마츠. 울지 마라.”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흘리는 아이의 뺨에 손을 대고 있노라니, 나 또한 울고 싶은 심정에 휩싸였다. 나는 참지 못하고 아이를 품에 안았다. 이대로 있다간 나까지 울어버릴 것 같아서. 근데 그건 진짜 쪽팔리잖아.

 

  조금씩 울음이 거세져 이윽고 몸을 떠는 아이의 등과 뒤통수에 손을 올리고 쉬이, 울지 마, 울지 말라니까, 하고 귓속말을 했다. 한참을 손으로 등을 도닥이며 어루만지는데, 애타게 기다렸던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음기가 섞이고 숨이 고르지 못해 중간마다 끊어지는 그 말은…

 

 

  “흐, 서, 선생님이 나를, 카라마츠라고 불러주는데. 흐으, 어떻게 안 울어.”

 

 

  그 어떤 미사여구를 갖다 대도 부족할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부푼 마음이 터질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뜨거움을 안은 손에 힘을 주고, 낮게 속삭였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언젠가 너의 세계에 내가 정식으로 초대된다면 해주고 싶었던 말.

 

 

  “…내가, 너를 ……해.”

 

 

  파도가 치고 폭풍이 일 듯 거세진 아이의 울음소리에 나는 못내 뿌듯함을 느끼며, 어느샌가 축축해진 내 눈가를 모른 척했다. 용기의 보상은 그 무엇보다 달콤했으니.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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